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08호 물가에서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1-10-31 10:40
조회수: 3308
 
물가에서                
                                                        

조병화


미끄러운 녹색으로 이끼 낀
물가에서
노을을 쉰다.

한적한 다리목
아가를 싣고 가는 어린 어머니
맑은 눈에
홀란드 하늘이 파랗다.

물은 그 자리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다리 아래서
다리 아래서
천 년을 머물고

사람은 오고 가는 거
인생은 변하는 자리
사라져 가는 흔적

미끄러운 녹색으로 이끼 낀
물가에서
노을을 쉰다.

(1969. 9. 7 Amsterdam 어느 다리목에서)

-제17시집 <<내 고향 먼 곳에>> 에서


  암스테르담은 어딜 가나 물이고, 다리고, 나무고, 벽돌집이다. 작은 운하의 넓은 도시, 그것이 울창한 숲 속에 고요한 인간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공원으로 몰려드는 비둘기 떼와 물가로 모여드는 오리와 갈매기 떼들, 하늘에 펄럭거리는 기들, 아름다운 여성의 의상과 같은 도시 풍경이다.
  녹색과 청색과 적색과 백색, 이 4색이 청명하게 배합되어 물기 차게 흐르고 있는 사랑스러운 도시, 어딜 가나 즐거운 웃음이다.
  자전거를 탄 소년, 소녀, 자전거를 탄 숙녀, 신사, 남녀노소들이 자전거를 몰며 인생을 산다.
  건전한 생활, 건강한 생활, 그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끌고 자유스러운 시공(時空)을 살 때 만이다.
  현대는 어딜 가나 자동차의 물결이다. 자동차는 확실히 편리한 생활 도구다. 그러나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 부자유스러운 생활 도구인가.
  인간은 걷는 생활이 좋았다. 그리고 자전거 생활까지도 좋았다. 좀 더 넓히자면 소리 요란하지 않는 오토바이까지는 좋았다. 흙 냄새도 있고, 풀 냄새도 있고, 바람 냄새도 있고, 자연 냄새도 있었다. 그리고 속삭이고 이야기 하고 웃는 생활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의 홍수 시대는 공포와 불안과 스피드만이 있는 피곤 뿐이다.
  내가 늙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띄엄띄엄 인간이 그립던 옛날이 좋았던 정, 물가에서 풀어 본다.

                                              조병화, 『내고향 먼 곳에』, 중앙출판공사,  pp.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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