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38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2-12-16 16:04
조회수: 33
 
지금 나는 다시 소라로


지금 나는
눈에 들어오는 바다가 아니라
귀로 들어오는 넓은 바닷가에서
다시 소라와 놀고 있습니다.

그 옛날 내가 젊어서 길을 잃고
흐린 겨울 바닷가에서 만났던 어린 소라는
지금은 이젠 늙고, 큰 소라가 되었으나
날로 기진맥진, 바닷물에 밀리며
찾아가야 할 고향을 찾고 있습니다

온종일 바닷물은 혼자서 밀리고 쓸리고
철석, 철석, 술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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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노트

그 옛날, 그러니까 해방이 되고 얼마가 되었을까. 지독한 좌절감이라고나 할까, 꿈을 잃고 방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본래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에서 큰 꿈을 가지고 물리화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물리화학의 길로 나의 흔적이 남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이름이 남는 실험이나 이론을 연구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망해 버리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생각이 들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하려 했으나 그것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의 모교인 경성사범학교에서 물리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내 자신의 꿈은 막연해지고 내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무렵에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좋아했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읽었던 시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시가 「소라」였습니다.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허무한 희망에/몹시도 쓸쓸해지면/소라는 슬며시/물 속이 그립답니다//해와 달이 지나갈수록//소라의 꿈도//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큰 바다 기슭엔/온 종일/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

이것이 그 전문이었습니다. 이런 시들이 한 30편쯤 모여 있을 때 같은 학교에서 영문학을 교수하시던 김기림(金起林) 선생이 장만영(張萬榮) 시인에게 소개해서, 장만영 시인이 경영하고 있던 산호장(珊湖莊) 출판사에서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이라는 첫 시집으로 출판이 되었던 겁니다.
1949년 7월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생판 모르는 소위 문단이라는 험악한 곳으로 뛰어들게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어서 나는 점점 살아남을 길을 시의 세계로 개척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시집이 나오니까, 김광균(金光均)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봉구(李鳳九)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양병식(梁秉植)이라는 평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시집을 장정해준 김경린(金璟麟)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박인환(朴寅煥)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김기림 선생의 측근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말하는 소라는 그 때 그 소라시절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늙어서 눈으로 들어오는 활기찬 푸른 바다가 아니라, 귀로 들려 들어오는 늙은 바다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실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가버린 겁니다. 그 옛날에 길을 잃고, 꿈을 잃고, 세월을 방황하던 바다였습니다만 이젠 늙어서 모든 것이 귀찮고 기력 없는 바다, 안착만 하고 싶은 바다입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시를 여행해 왔습니다. 제37숙까지 거쳐 왔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어디 하나 오래 머물고 싶은 숙소(宿所)는 없습니다. 항상 바닷바람, 들바람, 산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허술한 숙소(宿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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