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60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3-03-03 13:13
조회수: 110
 

비는 내리는데
-미도파 부근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그대로 어둠이 되는 미도파 앞을 비는 내리는데
서울 시민들의 머리 위를 비는 내리는데

비에 젖은 그리운 얼굴들이
서울의 추녀 아래로 비를 멈추는데
진종일을 후줄근히 내 마음은 젖어내리는데

넓은 유리창으로 층층이 비는 흘러내리는데
아스팔트로 네거리로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대로 발들을 멈춘 채 밤은 내리는데

내 마음 속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내 마음 밖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막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가난한 방에 가난한 침대 위에
가난한 시인의 애인아... 어두운 창을 닫고
쓸쓸한 인생을 그대로 비는 내리는데

아무런 기쁨도 없이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하루가 오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미도파 앞에 발을 멈춘 채 내 마음에 밤은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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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노트

이 시도 시에 있어서의 리듬을 강하게 나타내며 그 강하게 나타낸 리듬을 통해서 시의 주제가 잘 나타나도록 시도한 작품입니다.
도시인들의 생활과 그 애수 같은 것이 이 시의 테마입니다.
이 시는 나에게 있어서 비교적 초기의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1950년 중반기, 부산 임시수도에서 수복(1953)해서 얼마되지 않을 때의 서울 도시인들의 저녁 풍경입니다.
그땐 비가 와도 비닐 우산 같은 임시편통의 우산도 없었습니다.
비가 심하게 오면 추녀 밑으로 비를 피했다가 비가 그치면 보행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하루의 일과처럼 서울고등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소공동에 있었던 경향신문 문화부에 들렀다간 명동으로 술을 마시러 가곤 했었습니다.
매일 같이.
경향신문사 문화부엔 김광주金光洲(소설가) 선생이 문화부장으로 있었습니다.
김광주 선생은 일제시대 중국에 있었으며 김구(金九) 선생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임시정부 요인들하고 같이 귀국하신 분이었습니다.
김광주 선생은 그때 우리들의 보스였었습니다. 소설가 이봉구(李鳳九), 시인 박인환(朴寅煥), 방송작가 이진섭(李眞燮), 연극인 이해랑(李海浪)씨, 성악가 이인범(李仁範) 선생,... 이런 그룹의 총수였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명동 가족이었습니다. 이해랑씨 말대로 '호적이 없는 가족'들이었습니다.
김동리(金東里)씨가 거느리는 문협파(文協派)와는 달리 우리들은 조직이 없는 ‘인간고도人間孤島’(나의 그 무렵의 시집 이름, 1954)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실로 조직이 싫었습니다. 조직이 없는 무리로 우리들은 명동을 중심해서 도시인들의 고독과 애수를 살았었습니다.
참으로 많이도 술을 마시고 많이도 작품들을 썼었습니다.
이러한 도시인의 고독과 그 애수를 테마로 참으로 많은 작품들을 썼었습니다. 이 시가 그 대표적인 그 당시의 나의 작품입니다.
이 시는 먼저서도 이야기했듯이 리듬을 무엇보다도 살리며 강조하며 그것으로 주제를 강하게 나타내려 한 것인데 비교적 성공을 한 작품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테마이며 그 테마를 살리는 글의 표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테마를 살리는 시의 문장은 좋은 메타포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럴려면 무엇보다도 언어의 선택과 그 선택된 언어의 리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언어와 언어의 결합에서 오는 메타포, 그 내용과 문장의 리듬, 이것이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피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장의 리듬에서 우러나오는 시점의 리듬, 그 마음의 리듬이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테마가 풍기는 리듬도 있겠지요.
그 시에서 무엇을 쓰느냐, 그것이 잡힌 다음에 문장구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시에 있어서 무의미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지금도 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시에 있어서 의미를 배제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다만 언어의 수식에 지나지 않는가? 수식에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어의 무의미적 나열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럼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시에 있어서 그 내용이 되는 그 의미(테마)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왔습니다. 내용이 없는 시들은 죽은 언어의 혼합체라고 밖에 생각치 않습니다.
언어의 집합이 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의 나열이 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글의 혼이 될 수 있는 중심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글의 삶이 되는 중심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실로 글의 생기는 그 글의 테마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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