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827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12-02 17:26
조회수: 223
 
89 첫사랑

밤나무 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
얼마만큼이나 나란히
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
유월 논밭에 깔린
개구리 소리

아, 지금은 먼 옛날
하얀 달밤
밤꽃 내
개구리 소리.

                      시집 『머나먼 약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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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도 제 26시집 『머나먼 약속』에 들어 있는 평범한 시입니다. 언젠가 전주에 강연차 내려갔을 때, 전북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최승범 교수가 첫사랑에 관한 시를 청탁해왔습니다.
  나의 첫사랑의 장소도 전라북도 임실이라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아득한 옛날을 더듬어서, 그 첫사랑 시절의 순직스럽던 정경을 시로써 그려 본 것입니다. 내가 다니던 경성사범학교는 보통과(중학교 과정 5년간)서부터 연습과(전문과정 2년간)까지 일 년에 한 번씩 있던 수학여행 코스가 정해져 있어서, 보통과 1학년엔 개성(당일), 2학년엔 평양(1박 2일), 3학년엔 금강산(4박 5일), 4학년엔 일본 규슈(九州, 5박 6일), 5학년엔 일본 본토(7박 8일), 그리고 연습과 1학년엔 만주국(지금의 중국 동북성, 7박 8일), 2학년엔 농촌실습(한 달), 이렇게 예정대로 실행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연습과 2학년 졸업반에서 전라북도 임실에 있는 동국민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민가에 하숙을 정해 가지고 한 달 동안 교육 실습, 농촌 실습을 하는 거지요. 수업도 하고, 농촌일도 거들어주고.
  이 동국민학교에 창씨개명으로 후미구라미야(文倉宮)라는 여교사가 있었습니다. 전북고녀를 나왔다고 했습니다. 전북고녀 시절 육상경기의 선수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첩을 얻어서 어머니하고 별거를 해서 신태인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여동생 하나와 어머니와 셋이 이곳 임실에 남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여선생이 가련하게 여겨져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 연민의 마음은 애정으로 이어져 가서, 밤이면 남몰래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논밭머리 개울가 밤나무 숲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정대로 동경으로 유학을 가야했기 때문에 수차례 편지 왕래가 있었지만 사랑보다 꿈을 선택해서 작별을 했던 겁니다. 가냘픈 들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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