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42호, 낙엽끼리 모여 산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2-04-13 17:28
조회수: 3462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시집『하루만의 위안(慰安)』에서.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이층에서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낙엽이 무수히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실로 무수히.
  찰나 ‘아, 나는 낙엽을 깔고 잤구나, 낙엽에 누워서 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다. 서울고등학교에는 나무들이 많았습니다. 술이 깨면서, 다음과 같은 시가 술술 풀려 나왔습니다. 특히 다음 구절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학교 학생시절부터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더듬어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보이는 이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세계로.
  그것이 이렇게 해방이 되고선 엉망진창으로 조국의 현실이 나를 실망케 만들고, 그 길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어지럽게. 좌익이다, 우익이다, 통치다, 신탁 통치다, 이러한 생존의 먼지로.

...

  그러한 한심한 낙엽 같은 정치의 가을 풍경 속에서 나는 그저 쓸쓸히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서 슬픔을 마시고’ 살아 왔던 겁니다.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자란다, 문학수첩 1995, p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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