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819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10-26 12:17
조회수: 245
 
80 네가 인편에

네가 인편에 보내 준 파이플 물고
연길 풍기며
3월의 난로가에서
네게 첫 편질 쓴다

고맙다

크는 줄 모르게 커서
어느새 시집을 가
하늘 건너 낯설은 먼 그곳
그곳에서 나를 생각
보내 준 파이프

고맙다

이렇게 나는 세월 서툴게
세월 살아가며
세월 보내는 마음
항상 쓰린 바람
실로 이 비밀, 너희들에겐 미안하다

좋은 아버지 구실 그리 못하고 이 나이
지금 파이플 받아
파이플 피우고 있는 심정
바람 찬 겨울
빈 나무 위의 빈 새집

간 세월
가물가물
가물거리는 너희들의 얼굴

지금 너의 파이플 피우며
네게 첫 편질 쓴다.

                          시집 『딸의 파이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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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1978년에 출판한 『딸의 파이프』라는 나의 제 24시집에 들어 있는 시입니다(일지사, 1978.6.26. 간행).
  이 무렵 나는 크게 고독했고 아주 인생이 쓸쓸했습니다. 학교가 그렇고, 가정이 그렇고, 매우 암담한 겨울 같은 기분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막내딸 영(泳)에게서 인편으로 파이프와 엽서가 전달되었습니다. 파이프는 수제(手製)이고, 엽서의 그림은 쥐의 가족이 이사를 가는 풍경이었습니다. 쥐의 한가족이 그려져 있었는데, 쥐의 아버지는 손수레를 끌고, 쥐의 엄마는 아이를 업고 뒤에서 밀고, 쥐의 아들 형제들은 옆에서 손수레 미는 것을 거들어 주고, 하는 이삿짐 나르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의 아버지는 앞에서 손수레를 끌면서 파이프를 의젓하게 물고 있었습니다.
  그 의젓한 쥐의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평생 의젓하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나를 생각해 보았던 겁니다.
  한 번도 의젓하게 꾸미고 살아갈 수가 없었던 나의 신세와 그 인생 철학, 항상 뜨내기로 떠돌이로 나그네로 편운무숙(片雲無宿)으로, 운수(雲水)를 살아가는 나의 인생가숙(人生假宿)의 철학이 처절하게 슬피 나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한 철저한 인생의 적막(寂寞)의 철학으로 편지 답장을 쓰면서, 눈물로 이 편지를 시로 만들었던 겁니다. 연시 10편을. 이 시는 그 10편 중의 한편입니다.
  지금도 일관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나는 중 팔자인지, 집에 살아도 집이 아닌 것 같고, 가족이 있어도 가족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소유물이 있어도 그것이 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일체가 나에겐 무(無)요, 공(空)이란 생각만 들은 겁니다. 때문에 나는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은 무와 유의 세계를 만판 빈 존재의 우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의 가정의 비극은 이러한 곳에 있었던 겁니다. 한국에 있어서의 나의 문학의 비극도 이러한 현실에서의 유리(流離)에 있었던 겁니다. 현실과 영원, 그 속에서 나는 영원을 살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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