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72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08 13:14
조회수: 164
 
33 鄕苑(향원) (명동 소묘)

        
        ‘향원’은 좋은 술을 주는 집이다
        ‘향원’은 즐거운 우리 벗들이 술을 나누러 가는 곳이다
        ‘향원’은 명동 외떨어진 곳에 호올로 있는 집이다

        이 집의 주인 향원 부인은 학의 태생이다
        학은 내릴 자리를 가려서 내린다는 새 이름이다
        향원 부인은 먼 목소릴 한다

        학은 연백평야 당진평야에 무리를 져서 내린다는
        보통학교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그런데 무리를 잃은 학은 어떻게 살까, 시인의 이야기다
        학이 아닌 새와 사귀어서 살지, 시인의 이야기다
        술을 들자, 가물이 낀 인생의 한여름 떡갈나무 잎새 아래
        고운 약수와 같은 우리 술을 들자, 시인의 이야기다

        ‘향원’은 좋은 술을 주는 집, 향원 부인은 혼자서 도는 학이다.

                                                시집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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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 깊숙이 들어가서 ‘향원’이라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식을 겸한 술집이 있었습니다. 명동에선 고급한 음식점이었습니다. 때문에 명동을 출입하는 명사들이 자주 들르는 좀 값이 비싼 술집이었습니다.
  이집 주인은 권영숙(權英淑)이라고 했습니다. 미망인이라고 했습니다. 독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 미인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매력적인 분위기를 몸에 감고 있는 중년 부인이었습니다. 이 고급하고 교양 있는 여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실로 장안의 인텔리 멋쟁이 신사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어느 날 나는 이진섭(李眞燮, 시나리오 작가, 방송인, 번역가)하고 밤늦게 술을 마시러 이 집에 들렀습니다. 이차, 삼차, 술집을 돌아다니다가 라스트로 들렀던 겁니다.
  소문에 듣던 그 교양 있고 고급한 분위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권 여사가 카운터에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사색적인 고요한 모양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따뜻한 정종(청주)에 깨끗한 안주, 고요한 분위기, 나 같은 야성적인 술꾼에겐 대단히 조심스러운 술집 분위기였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호주머니에 좀 여유가 생기면 좋은 친구들하고 비교적 자주 이 향원에 들르곤 했습니다. 김광주 씨랑, 이봉구 씨랑, 박인환이랑, 이해랑 씨랑, 유호 씨랑, 이진섭이랑.
  이렇게 단골로 다니던 어느 크리스마스날, 나는 뜻밖에 이 분위기 좋은 부인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바바리코트였습니다. 홍콩에서 들여온 외제였습니다. 나는 이 외제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더욱 이 집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이 시가 나왔습니다. 이 시는 문화부장 김광주 선생의 청으로 경향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실려서 세상에 나오자 한창우 사장이 대로하면서 “경향신문이 밥집 선전이나 하는 신문이냐”고 소리쳤다는 겁니다. 한창우 사장 일행도 이 집이 좋아서 자주 식사하러 다니면서도, 권영숙 여사와 친숙하면서도, 나는 그 이유를 지금도 궁금히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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