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49호, 화랑초(花郞草)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2-05-23 10:10
조회수: 3435
 
태백 산맥이 줄기진 야산에 누워
푸른 하늘을 덮고 화랑을 피운다

그 맑은 우울한 일기들이
부산 가로에서
온종일
알제리안 파이프를 물고
빈곤한 철학을 팔고 있을
이 순간에

눈 내리는 능선엔
생명처럼 포성이 스치고 간다

인생의 황혼처럼 흐르던 거리
흐르는 밀도 속에 끼여
그 많은 화려한 옷자락들에
가슴을 상쳐

슬픔을 잃은 가슴을 안고
전토로 돌아오던 그 날을 기억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조국이 싫다는
닥터 김은 어디로 갔나.

작별이 아닌 작별 속에
준이나, 진이나, 원이나,
원거리상의 사랑들처럼 저 멀리 간다

포성이 우거진 능선을 타고
나의 일과를 생각한다.

유엔군 보급 트럭이 북진하는
산맥과 산맥에
흰구름이 뜨고

어젯밤 싸우고 돌아온 전우들과 나란히
건초를 비비고 화랑을 피운다

회상이 없는 사나이들처럼
태백산맥이 줄기진 야산에 누워
그것이 생명들처럼 스치는 포성을 듣는다

아무 말 없이.


시집 『패각(貝殼)의 침실(寢室)』에서.



  부산에 피난을 가선 한때 나는 아무런 일도 없이 부산 광복동, 남포동, 거리를 그저 이리저리 쏘다니며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학교도 시작이 안 되고 해서 본의 아닌 룸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복동의 우리들 피난 예술인 아지트는 ‘금강’다방이었습니다. 이곳에 가면 문인, 화가, 음악가, 연극인, 신문기자, 잡지기자 들이 아침부터 우굴우굴했습니다. 김환기, 이중섭, 이인범, 이해랑, 김광주, 김소운, 이진섭, 윤용하, 임긍재, 박연희∙∙∙∙∙∙ 이러한 이름들이 생각납니다.

∙∙∙

  이러한 무료하고 따분한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철도연대로 종군해 볼 마음은 없느냐?” 하는 청이 들어왔습니다. “조건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다소간의 용돈과 한 달 쌀 한 가마, 정훈부군속”이라는 말에 나는 응하기로 했습니다. 한 달 쌀 한 가마라는 데 더욱 마음이 갔습니다.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니까.

∙∙∙

  그 당시 부산엔 투박한 ‘알제리아’라는 파이프가 나돌고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다방에서 이 알제리아 파이프를 물고 문학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하던 비생산적인 하얀 인텔리 문인들, 그와는 반대로 일선에서 사느냐, 죽느냐, 미느냐, 밀리느냐, 하는 심각한 생존의 전투병들, 이러한 시국상황 속에서 나의 청춘은 일그러져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에겐 ‘화랑초’담배가 보급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 ‘화랑초’담배를 피우며 밤이면 침대에서 채정근 변역, 레마르크 원작의『개선문』을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자란다』, 문학수첩, 1995, pp 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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