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39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06 18:49
조회수: 71
 
『시로 쓰는 자서전--세월은 자란다』 1995년 6월 15일 문학수첩

머리말

시문학의 계간지 <시와 시학>사에서 ‘시로 쓰는 나의 자서전’의 연재를 부탁받고 한 4년간 연재하고 나머지를 써서 오늘 현재까지의 ‘시로 쓰는 자서전’을 마치기로 했습니다.
다소 미비한 점도 있지만, 한이 없고 피곤도 해서, 이런 정도로 출판사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미리 약속한 대로 <문학수첩>으로. 실로 시는 나의 인생이었으며, 내가 쉬지 않고 걸어 온 길이었습니다.
또한 나의 시는 나의 인생관의 파편들이었으며, 그 시의 총체는 나의 시론이었습니다. 때문에 나는 기성 시론보다는 시를 쓰면서 나의 시론을 세워 왔던 겁니다.
내가 기성 종교를 믿지 않고, 내가 나의 경험으로 나의 종교를 추구해 왔듯이.
주어진 종교가 아니라 찾아가는 종교처럼, 주어진 종교가 아니라 발견해 가는 종교처럼.
그렇게 항상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 준 것은 죽음이며, 그리움이며, 사랑이며, 꿈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과 허무, 그 고독이었습니다. 그 고독은 나에게 있어서 적막한 희열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부끄러운 인생, 부끄러운 글, 부끄러운 철학, 나는 지금 이렇게 이 원고를 마치면서 부끄러운 내 인생에서 해탈을 하고 있습니다. 공(空)으로.
                                        
                                                1995년 6월 편운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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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

경기 남부, 작은 농촌 마을에
꿈이 많은 소년이 있었다.

자라나면서 소년은
낮엔 산이나, 들이나, 개울이나,
혼자 다니면서 들짐승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산새들의 등지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상스러운 꽃들을 모으기도 하고,
공사리, 가재, 산새 새끼들을 잡기도 하고,
어머님하고 산나물을 하러 높은 산에도 오르고,
흙처럼, 들풀처럼, 바람에 날리기도 하면서

밤엔 반딧불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에 누워
먼 하늘에 떠도는 무수한 별들을 헤어보기도 하고,
쏜살샅이 떨어지는 별똥을 쫓아가기도 했다.

학교에 가는 길 십리,
학교에서 오는 길 십리,

가닥 비가 와서 개울이 넘친 날엔
그냥 되돌아오다가 방앗간에 들러서
아이들하고 딱지를 치기도 하고,
도시락을 다 먹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활을 쏘기도 하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쥐불을 놓고 윗마을, 아랫마을과
패싸움도 하고, 뒷동산에 올라서
정월 대보름 달맞이도 하고,
남사당, 두레꾼들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나는 1921년 5월 2일에,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蘭室里)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음력으로는 3월 25일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축시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님 말씀이 태몽에 꽃을 많이 안았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은 시골 한학자, 호를 난유(蘭囿)라고 했습니다.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소농이었습니다. 마을의 중심되시는 분이었습니다.
  난실리는 본래 한양 조씨(趙氏)의 마을이었습니다. 전에는, 그러니까 내가 어린이로 자라고 있었을 때엔 사람들이 얼마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확하게 39호가 살고 있는 농촌입니다. 6·25 동란 이후엔 여러 성씨(姓氏)들이 모여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농촌 마을에서 나는 여덟 살 되던 이른 봄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나는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봄, 그러니까 4월에 용인군에 있는 송전공립보통하교(松田公立普通學校)에 들어갔습니다.
  용인군과 안성군의 군계에 우리 난실리는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용인군 이동면 송전리까지는 걸어서 10리가 되는 거리였습니다.
  이곳을 매일 나는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가는 길에 개울이 있었습니다. 공동묘지도 있었습니다. 그 개울 이름이 송전천(松田川)이었습니다. 장마의 계절, 비가 많이 내려서 개울이 넘치고, 다리가 끊어지면 그곳까지 갔다간 도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날도 출석으로 해 주었습니다. 공동묘지 앞을 지나가는 것이 무서워서, 사람이 오는 걸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자동차는 가끔 이곳 송전에서 보곤 했습니다. 아주 드물게 이곳까지는 자동차가 경부선 오산(烏山)에서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 운전수가 나에겐 참으로 멋있게 보이곤 했습니다.
  나의 난실에선 안성장 30리, 오산장 40리, 용인장 30리, 그 오일장을 걸어 다니면서 생활  필수품들을 교환하곤 했습니다.
  걸어서 다녔지만, 마차가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나는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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