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의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32호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06 18:42
조회수: 80
 
그림

  이번 휴교기간 중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30호짜리 2점, 10호짜리 5점, 8호짜리 5점, 6호짜리 4점, 그러니까 16점의 그림을 그린 게 된다. 소재는 주로 나무들이다. 안개 속에 고요히 묻혀있던 나무들이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가다. 포플러나무는 포플러나무대로, 아카시아나무는 아카시아나무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수양버들나무는 수양버들나무대로, 목련나무는 목련나무대로,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대로, 물오리나무는 물오리나무대로 점잖게 가을을 물들여 가고, 잎새들을 덜어가는 모습이 숭고하고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학원 캠퍼스 안에 무수히 들어차 있는 이러한 자연의 벗들을 보며 잊고 살던 자연 세계를 되새겨보곤 하면서 그 발견과 그 희열(喜悅)과 경이(경이)를 나대로 화폭에 담아 보았던 거다. 설사 그것이 서투른 표현이 되었다하더라도 그림을 그린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나하나 색을 골라 칠하면서 어렸을 때 보면 그 나무들, 그 나무 아래서 같이 지내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일들을 회상하면서 지금의 나를 그리는 거다. 각자 각자 모여서 서 있으면서 각자 각자 떨어져 서 있는 나무들, 그것이 늦가을 고요한 안개 속에서, 아름다워서 더욱더 적막할 정도로 ‘안개 속을 걸어간다. 이상도 하다. 나무는 나무대로, 돌은 돌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모두 혼자들 있다.’ 이렇게 옳은 H. 헤세의 「안개」라는 시귀절을 생각하며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나 스스로를 화폭 어느 구석에 그리고 있는 거다. 나는 이러한 순수 고독이 주는 철학으로 만년 사춘기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현대의 원시를 찾아 헤매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동물의 한 종자처럼 사방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이러한 안개 속의 숲길을 더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가을, 나무는 나의 새로운 발전이며, 그 위안이었다. 지금 나의 방은 그러한 생각하는 나무들로 가득하다. 아직 기름 냄새를 풍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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