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003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3-07-31 16:39
조회수: 296
 

국제 전화


국제 전화로 이따금 소식을 알리는
너희들의 가는 목소리는
먼 이승에서 이곳 저승으로
캄캄한 직선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목소리

순간, 이렇게라도
서로 안부 전해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러다가 아주 줄이 끊어진
저승으로 훅, 올라가 버리면
그나마도 들리질 않겠지
하는 생각에
그저 고마운 눈물이 나오곤 해요

이러질 말자 다짐하면서도
늙어지면서 약해진
할아버지의 눈물
너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찔금찔금 나오는 걸 어찌하리

너희들에게 존경받는 일을 했는지
부끄러운 일을 했는지
한 번도 따져 본 일 없이
단숨에 이곳까지 올라와 버린
나의 생애
스스로 스스로를 생각해 볼 때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지금도 이곳인가, 저곳인가
나의 혼은 아직
일정한 장소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먼 길을
부지런히 찾아 올라온 것뿐
항상 더듬거리던 고독한 혼자가 아니었던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기 서울 혜화동이세요?
먼 그곳, 너희들의 가는 목소리
암, 아직은 혜화동이다.


詩想노트

먼 미국 땅에서 자라고 공부하고 있는 손자, 손녀들하고 이따금 국제전화로 그 목소리를 교환할 때의 나의 심정을 이렇게 이 시로 표현해 본 겁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저승으로, 손자 손녀가 살고 공부하고 있는 곳을 이승으로 설정을 해 놓고 이미 나는 저승에 가 있는 것으로 해서 이렇게 써본 겁니다.
그리고 내가 생전에 해 놓은 그 업적이 손자, 손녀들에게 부끄럽지나 않을까 하고 반성을 해 보면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었으면 하는 가느다란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돈은 못 남겼어도 그들에게 부끄럽지나 않은 할아버지가 되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부질없는 시를 쓰면서 재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쓰면서 나는 참으로 어두운 시를 부끄럽게도 많이 써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다음이라도 내 시는 읽어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겁니다.
사실 나의 시는 밝은 것보다는 어두운 것이 많고,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많고, 희망적인 것보다는 절망적인 것이 많고, 행복한 것보다는 쓸쓸한 것이 많고, 명랑한 것보다는 고독한 것이 너무나 많고, 개인 하늘 같은 것보다는 흐린 날 같은 것이 많아서 때때로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삶보다도 죽음이 많고.
그러나 일부러 그렇게 쓰려고 해서 쓴 것이 아니고, 내 운명이 그렇게 쏟아져 나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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