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000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3-07-22 12:23
조회수: 324
 

주 점


일체의 수속이 싫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뚫고 드는
우울을 견디지 못해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나는 먼저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해 본다

필요 이상의 예절을 지켜야 할
아무런 죄도 나에겐 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지극히 우울해진다
한때 이 거리가
화려한 화단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기 싫은
그 날이 있고부터
이 거리의 회화會話를 나는 잊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런 소속조차 이미 나에겐 권태스러워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눈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산다는 것이 권태스러운 일이 아니라
수속을 해야 할 내가 있어
그 많은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어
눈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아버지가 된 그 일이
마침내 어쩔 수 없는 내 여생과 같이.


詩想노트

이 시는 부산 피난시절에 쓴 겁니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사항은 이렇습니다.
국정교과서 중학교 국어책에서 청탁을 받아서 ‘일기’'라는 산문을 한 30〜40매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고료가 나왔다는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한국은행에서 지불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자주 들렀던 부산 광복동 금강다방에 술친구들을 모아 놓고 그 길로 원고료를 찾으려 한국은행 부산 사무소로 갔습니다. 찾아서 즐겁게 친구들하고 술 한잔 할려고.
피난간 한국은행은 지금의 부산시청이던가 그 근방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찾아 갔더니 이곳이 아니라 대청동에 있는 국고금취급처로 가라고 하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또 그곳을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그곳을 찾아서 갔더니 점심을 먹으러 가서 아직 자리에 그 돈을 지불하는 담당자가 없다는 겁니다. 또 하는 수 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엔 관리들이나 공무원들이 제자리를 제시간에 잘 지키고 있질 않았습니다. 제멋대로 직장생활을 하고들 있었습니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담당이라는 작자는 술에 취해서 어슬렁 어슬렁 기어들어 왔습니다. 나는 한 두 시간쯤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순간 나는 비굴한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이 몇푼 되지 않는 원고료를 타기 위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나는 그래도 참고 그 통지서를 그 친구에게 냈습니다. 보자마자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오시오.” 하는 겁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보,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구, 이러기요.”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쭉 내 모양을 보고 있었던 다른 은행원이 “그러지 말고 빨리 내드려라.”라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실로 쥐꼬리 만한 원고료를 찾아가지고 와서 금강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친구들하고 화풀이를 겸해서 흠뻑 썩은 조국을 마셔 버렸습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 시와 같이 이 시는 그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 우울한 날을 기록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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