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81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15 12:51
조회수: 77
 
42 밤의 이야기ㆍ4

어느 날 내가
종로 네거리 하늘 꼭대기 양지 다방 한구석에서
불교를 이야기해 주는 선생과 같이
밤 깊이 도통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불교를 이야기해 주고 있던 선생은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따짐을 이미 가리지 않는 사람일수록
도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밤 깊이 마음의 자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종로 네거리 하늘 꼭대기 양지 다방 서울 한가운덴
실재처럼 시간이 자옥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실처럼 일체가 텅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리창 속엔 날개 접은 생명들이 꿈벅거리고 있었는데
일체의 허虛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선생의 웃음 소리
밤은 이미 그 자리를 잡아 침전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잎새를 추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종로 네거리 구름다리 꼭대기 가을이 지나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일체의 득실을 걷고 있었는데
시간은 이미 내 자릴, 일어서고 있었다

                                    시집 『밤의 이야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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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렵 나는 나의 서울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경희대학교로 교직 생활올 옮겨 놓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중앙대학교에 출강을 하고 있었지만.
  지리학과의 김경성(金庚星)이라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시간강사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김경성이라는 교수는 일본 시대의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아주 학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벌써 세상을 떠났지만. 이 김경성 교수는 입담이 세고, 불교 신자로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아주 해박했습니다. 이분이 나에게 호감을 가져서 나는 아무런 이유없이 이분과 차도 자주 마시고, 술도 자주 마시곤 했습니다
  이 무렵 나는 명동에서 종로로 생활 행동의 영역을 옮겨서 저녁이면 주로 양지다방, 아니면 금하다방을 이용하면서 그 뒤쪽에 있던 낭만(浪漫)이라는 비어홀(맥주집)을 이용하면서 쓸쓸한 문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지다방이나, 금하다방이나, 낭만 술집이나, 다 종로 네거리 서쪽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저녁이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서, 연세대 교수들, 이대 교수들, 동국대 교수들, 숙대 교수들, 그리고 우리 경희대 교수들이, 거의 매일, 똑같은 매 시각에 틀림없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문인으로서는 김광주(金光洲) 선생(소설)의 군단들, 특히 김수영(金洙暎) 시인, 조지훈(趙芝薰) 시인, 그리고 이헌구(李軒求) 선생(평론), 안수길(安壽吉) 선생(소설), 실로 온 문인들과 예술가들, 기자들, 지식인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참으로 매일 밤 번쩍거렸습니다.
  어느 날, 나는 이 김경성 교수와 같이 경희대학교에서 퇴근하여 이 양지다방에서 많은 시간을 앉아서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거의 다 김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옛날이야기에 도취해서 듣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김 교수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늘 '죽음의 사자’(시간, 가을)를 옆에 동반하면서 그 시간을 좀 늦춰 달라고 미루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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