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6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3-02-17 12:25
조회수: 107
 
어느 생애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사랑하기 위해서 시를 쓴다
죽기 위해서 시를 쓴다

때론 쓰리게
때론 아리게
때론 축축히
때론 멍멍히
때론 줄줄이

버리기 위해서 시를 쓴
빈 자리가 되기 위해서 시를 쓴다
혼자 있기 위해서 시를 쓴다

아름다움의 외로움을
사랑스러움의 쓸쓸함을
깨달음의 허망함을
연습하며
실습하며,

비켜나기 위해서 시를 쓴다
놓아 주기 위해서 시를 쓴다
물러나기 위해서 시를 쓴다
삶과 죽음, 그걸 같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소유와 포기, 그걸 같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상봉과 작별, 그걸 같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널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

詩想노트

나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나의 시세계를 고집하면서 그 고집한 시세계를 철저하게 혼자 살아왔습니다.
해방 후 시작이 그렇게, 50년, 60년, 70년, 80년대, 나의 성장기, 장년기가 그렇고, 지금 이 자리, 뜻밖에 그 문인협회 이사장 자리에 끼어들고서도 오로지 그 혼자의 시세계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국의 문단은 참으로 외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문파(Sect)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선비다웁게, 양심적으로, 청결하게, 선악을 가리면서, 정의스럽게, 영혼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독한 창작 정신을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할 문단이 값싼 정실관계로, 친분관계로, 이해관계로 얼키며, 분파적으로 서로 아성을 쌓고 서로 공박을 하며, 시기 질투로 살고들 있으니, 얼마나 외로운 세계인가.
문단에 나와도 외롭고, 문단에 나오지 않아도 외롭고, 오히려 문단에 나와서 더욱 외로운 곳이 이 한국 문단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시처럼, 나를 옹호하기 위해서 나 혼자 그 아성을 쌓고, 그 안에서 나의 운명인, 그 인생이라는 존재를 살아왔던 겁니다.
ism에도 휩쓸리지 않고, 어느 분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어느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느 감미로운 위안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자존심을 높은 깃대로 세워 그 나의 시의 외로운 성을 지켜왔던 겁니다. 나-ism으로.
창작은 워낙에 외로운 작업입니다. 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운명이 그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시인이기 이전에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외로움을 탔었습니다.
예술의 세계에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하면 디오니소스적인 어둠이 많은 세계에 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너무나 나의 고독한 숙명의 광맥을 파들어 갔습니다. 아주 깊이 파들어가면서 인간존재의 그 순수고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수고독의 종말인 순수허무를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시 작업은 그 순수고독과 순수허무에 얼켜 있는 그 인간존재로서의 시간의 광맥을 캐들어 가는 끊임없는 단독동굴의 작업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으로 이 순수고독과 순수허무를 숙명으로 가지고 있는 순간적인 시간적 존재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까닭없이 외롭고, 인간은 누구나 시간이 되면 죽어서 사라지는 운명입니다.
이 까닭없이 외로운 것이 순수고독이고, 시간이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 순수허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이 순수고독과 순수허무를 생(삶)의 숙명으로 지니고 이 세상에 나온 겁니다.
나의 시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 위안으로써의 순수고독과 순수허무의 가려진 작은 꽃입니다.
다만 그 꽃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맡을 수 있는 작은 가려진 꽃입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시를 시작했고,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시를 써왔고,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시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나는 내가 나를 버리기 위해서 시를 시작했고,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해서 시를 써 왔고,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해서 시를 쓰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시를 썼고, 나는 내가 죽기 위해서 시를 썼을 뿐입니다.
이렇게.
    
△ 이전글: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3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 다음글: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5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enF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