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61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07 17:52
조회수: 289
 
23 결혼 식장

        여자들이 모두 빨간 입술들을
        긴 목 위에 앉혀 놓고
        만국기 아래 상품들처럼 나열한다

        남자들은 모두 도야지 같은 입술들을 다물고
        햇빛을 두려워하는 짐승처럼
        목을 숙인 채 여자들을 마주본다

        신부와 신랑은 혼야의 예절을 생각하고
        귀빈들은 축사를 길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클레오파트라보다 호사한 신부와
        와이셔츠가 커서 거북한 신랑을 위하여

        빨간 입술들도
        도야지 입술들도

        금속제 훈장을 다는 가슴에
        종이꽃들을 얌전히 달고

        시인이라는 사람이
        소용이 없는 시를 읽는다

        이미 나에겐 그리운 것은 없지만
        과자를 흘리는 아이들에 끼여
        만국기 속에
        南美諸國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한다.

                                          시집 『貝殼의 寢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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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이 될 무렵, 광복동 네거리, 어느 번화한 예식장에서 이한직(李漢稷) 시인이 결혼을 했습니다. 신부는 재벌 김성수 씨의 따님이라고 했습니다.
  이한직 시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일제시대 경성중학교(일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게이오 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한 아주 귀족 취미가 짙은 멋쟁이 시인이었습니다.
  이한직 시인은 일제시대 경성중학교 다닐 때 『문장(文章)』 지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어린 모더니스트였습니다.
  부산 피난가서 처음 있던 문인 결혼식이라, 많은 문인들이 참석을 했었습니다. 김성수 씨와의 관계로 많은 정치인, 사회 인사들도 모여들었습니다.
  나는 부탁을 받아 그 식장에서 멋도 모르고 축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문단에 나와서 얼마 되지도 않고 해서 어리벙벙했습니다.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얼굴만 화끈화끈한 기억이었습니다.
  부산 천지는 그 당시 윤리 도덕은 땅에 떨어져서, 무차별한 성행위, 난잡한 사치 풍조, 바닥을 헤매는 주거 생활, 실로 무질서, 부조리, 막 이야기한다면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찰나적인 생활들이었습니다. 특히 성도덕은 땅에 떨어져서 그 질서의 행방이 없어졌었습니다.
  온 대한민국이 이 좁은 부산 천지로 모여들어, 가뭄에 졸아드는 웅덩이에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하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 바글바글하는 인간의 웅덩이 속에서 그저 한없이 그립던 것은 먼 곳, 그저 먼 곳, 그 태양이었습니다.
  그러한 현실과 끝없는 동경, 그 생존의 애수를 살면서, 그래도 의지할 곳은 하나, 시밖엔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고독한 시를 쓰며, 그 혼돈된 시대를 살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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