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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운金素雲씨와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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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안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또 한 권의 시집이 단숨에 묶여졌다. 실로 단숨이라 하겠다. 제1시집이 나오자 반년도 채 되기 전에 제2시집이 준비되었던 거다.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년 4월 10일 인쇄, 13일 발행, 산호장, 이것도 자비출판이었지만 나의 고향사람 이태직(李泰植)씨가 돈을 대주었다. 이태직씨는 대한정판사라는 동판인쇄소를 크게 하고 있었다.
시라 이름붙여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머리말을 쓰고 “위대한 인간 / 완성 / Albert Schweitzer에게 /바치는 작은 시집” 이렇게 헌사를 첨가했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요란하게 뒤끓고 있던 생존의 카오스 속에서 불안할수록 크게 떠오르던 인간, 그 슈바이처 같은 존재가 한없이 그리워졌던 거다.
인간은 인간을 살려고 나온 거지 정치를 살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살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권력이나 물질이나, 소유를 살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 그 평화와 사랑, 꿈을 살려고 나온 게 아닌가. 살려고 나온 거라기보다 이왕 세상에 나왔으니까, 그 평화, 그 사랑, 그 꿈, 그 인간을 살고자 하는 거,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아닌가. 한없이 좌절해가며 슬프기만 했다. 쓸쓸하기만 했다. 고독하기만 했다. 갈수록 암담하기만 했다.
그 순간, 순간, 위안 같은 걸 찾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독일인이 집으로 찾아왔다. 헤르만 실밤(Hermann Schilbam)이라 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일본소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경성중학교를 나오고, 일본 도쿄에서 상지대학 경제과를 다니다가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 독일 학병으로 제2차대전에 참전, 전쟁이 끝나자 다시 인천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독일인)·어머니(일본인)하고 셋이 살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술을 나누며 알게 되었다.
인천에서 세창양행이라는 무역상을 하고 있었다. 헤르만은 서울사무실에 매일 기차로 통근을 하고 있었다. 헤르만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슈바이처에게 바치는 작은 시집’이라는 글을 읽고 찾아온 거다. 자기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도 나와 같이 벗이 없어 대단히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저녁이면 그와 어울리게 되었다. 장소는 명동과 충무로 사이에 있었던 ‘스시큐(壽司久)’라는 일본 여자가 하는 정종집(남편은 한국인), 문인·예술인들이 가는 동동주·막걸리집이 아니라 고급한 일본요리 집이었다. 헤르만은 작은 다다미방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이층에, 매일같이 헤르만은 술을 마셨다. 이 방에서 혼자. 거기에 내가 끼어든 거다. 둘이 마시게 된 거다. 매일. 나는 수업이 끝나면 약속 없이도 그 방으로 갔다. 가면 혼자 마시고 있던 헤르만은 애인이나 온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이마에 큰 화상 같은 흉터가 있었다. 수줍기 짝이 없는 사나이였다. 좀처럼 말이 없었다. 술이 들어가도 그대로였다. 그러한 고독한 사나이였다. 이역 땅에서, 미혼으로
어느 날 몹시 취해서, 취했어도 몹시 수줍은 얼굴로, 그 말투로 “조 선생, 이것도 시가 될까요?” 혼잣말처럼 말을 끄집어냈다. 깊은 곳에서, “뭡니까?” 나의 말. 그러자 아주 작은 말로, 얕은 말로, 가만히 가만히 일본말로 “시라까바노 하다오. 기즈씨 끼나가라 / 아나다노 고도 오 오모이다시마시다” 이러했다. 순간, 나는 놀랐다. 어쩌면 그렇게 순진한 말이 그의 그 과묵한 입에서 나왔을까 하고, 우리말로 옮기면 이러하다. “자작나무 피부에 상처를 내며 /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의 배경은 이러했다. 경성중학교를 나오자 자기 어머니의 나라 일본으로 유학을 했다는 거, 어느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는 거, 그 여인은 항상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거, 그 여인이 그리워 매일 저녁이면 그 집으로 혼자 술을 마시러 갔다는 거, 가면 갈수록 그리워진다는 거, 견딜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나라 독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는 거, 그날로 아버지에게 송금을 청했다는 거, 돈이 오자 그 집에서 마지막 한잔을 하고 중앙선을 타고 상지대학 휴테(山莊)가 있는 산으로 갔다는 거, 휴테 옆에 있는 굵은 자작나무 껍질에 그 까만 여인의 이름의 이니셜 두 자를 새겼다는 거, 그 두 글자를 새기면서 자기도 모르게 두 줄의 말이 나왔다는 거다. 그 길로 헤르만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 → 레닌그라드 → 바르샤바 → 베를린, 이렇게 긴 여행을 하고 베를린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독일 학병, 그리고 종전이 되어서 인천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자작나무 피부에 상처를 내며 /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매일 밤 헤르만과 나는 시대를 상실한 가련한 영혼에게 상처를 내면서 낙오자끼리 술을 마시고 있던 거다. ‘스시큐’ 아래층에선 거의 매일 밤 이헌구·이하윤·변영로·오종식(吳宗植: 당시 경향신문 주필), 이런 노장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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