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811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9-28 12:33
조회수: 69
 
72 남남 3

넌 하나를 내세우고
난 아홉을 내세운다면
서운하겠지
그럼, 넌 둘을 내세우고
난 여덟을 내세운다면
그래도 서운하겠지
그럼, 넌 셋을 내세우고
난 일곱을 내세운다 하자
그래도 서운하겠지
그럼 넌 넷을 내세우고
난 여섯을 내세운다 하자
그래도 서운해할는지
그렇다면 절반 절반
너도 다섯 나도 다섯, 같이 내세운다 하지
그래도 서운할는지
그렇다면 넌 여섯을
난 넷을 내세운다 하지
그래도 시원치가 않을는지
그렇다면 넌 일곱을 내세우고
난 셋을 내세운다 하지
그래도 시원치가 않을는지
그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그럼 이렇게 하지
넌 열을 다 내세우고
난 네 앞에 공으로 돌지
그래도 넌 서운하겠는가.

                            시집 『남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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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한국 시단에서는 소위 난해한 시들이 우후죽순격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을 무렵, 나는 전봉건(全鳳健) 시인의 요청을 받아 『현대시학(現代詩學)』에 1973년 2월호부터 시를 매달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이 연재는 1975년 1월호까지 연속이 되었습니다만, 우선 그 동안 써 놓았던 시들부터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이 시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누구하고 다투는 성격이 못되고, 말다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순간부터 도망치는 성격이었습니다.
  모든 걸 양보하면서 져주는 것이 나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운동장에서는 그 심한 럭비 시합을 수백 번 해서 이겨냈지만, 사람하고 싸움엔 늘 지곤 했습니다.
  상대방이 기를 쓰고 대드는 데에는 나는 맥을 못 쓰곤 했습니다. 설사 내가 옳고, 내가 정당하다 하는 경우에도, 상대방이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제 주장만 우겨대는 데 있어서는 나는 아연 실색을 하면서 밀려나는 수밖엔 별 재주가 없었습니다.
  포기하는 것이지요. 상대를 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이지요. 포기하면서, 단념하면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곳에서 나의 마음의 편안을 찾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 많은 우격다짐을 견디어냅니까. 나는 그러한 기력도 없고, 상대방을 설득시킬 화합의 미덕도 없는 겁니다.
  이렇게 피하며 피하며 인간 관계를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겁니다.
  싫은 사람을 피해가면서 안 만나는 마음의 편안과 자유, 그 감정의 정직성, 그 내 감정의 정직성이 주는 맑은 고독, 그 맑은 고독으로 나는 나의 영혼, 그 시정신을 목욕하면서, 그 어렵던 연대, 연대를 살아 나왔던 겁니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도피행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를 살며, 인간이라는 인생을 사는 길이었습니다.
  때문에 나에게는 위선이라는 의상이 없습니다. 육체에 있어서나, 정신에 있어서나. 시대적인 고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투명한 고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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