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53호 첫사랑 (2010년 7월 13일)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0-07-13 13:54
조회수: 3992
 
                     첫사랑

                                                       조병화


                     밤나무 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
                     얼마만큼이나 나란히
                     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
                     유월 논밭에 깔린
                     개구리 소리

                     아, 지금은 먼 옛날
                     하얀 달밤
                     밤꽃 내 풍기는 개구리 소리.

                                        조병화,『머나먼 약속』


     내 나이 스물둘이었던가. 여름 방학을 앞둔 6월, 농촌 실습,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는 경성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경성사범학교는 졸업반을 전 조선 각지로 농촌실습을 보내고 있었다. 한 3주일을. 자기 지망대로.
     나는 졸업을 하면 도시에 남을 생각으로, 아주 먼 평양북도를 지망했다. 그러나 평양북도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아서 제비를 뽑은 결과, 전라북도 임실군, 동국민학교로 배당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에, 자주 눈이 가는 쓸쓸한 여선생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와 동생, 세 식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여선생은 자기 생모와 여동생을 부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월급으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 수심에 가득 차 있는 문 선생의 얼굴이 나는 좋았다.
    날이 갈수록 정이 들었다. 자주 학교 내에서가 아니라 멀리 마을 밖에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마을을 피해서, 사람을 피해서. 대충 사랑이라는 것은 몰래 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땐 몰래 만나도 수줍기만 하고, 손 한 번 변변히 잡아 보지 못했던 시대였다. 다만 화끈 화끈 몸만 달아올랐을 뿐이었다.
    임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는 밤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앞을 맑은 개울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개울물 건너서 논밭이 있었다. 달밤에 그 넓은 논밭은 하얗게 뿌옇게 보였다. 그 하얗고 뿌옇게 보이는 논밭에서 무수한 개구리들이 경쟁이나 하는 것처럼 울어 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나란히 밤나무 아래 개울가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말이 잘 안 들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개구리들은 인정사정 없이 울어댔다.
    삼 주일이 다 갔다.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많은 뜨거운 가슴을 남기고 편지가 자주 오고갔다. 오고가면서 점점 사랑이라는 감정이 짙어갔다.
    그러나 나는 일본 도쿄로 공부를 더 하러 갈 예정이었다. 꿈이었다. 나는 그 꿈과 사랑 사이를 많이 생각, 방황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인가, 고민하다가 꿈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내 첫사랑의 이별이었다.


                                       조병화,『꿈이 있는 정거장』, 고려원, pp. 40-42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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