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90호 한 떨기 장미와도 같이 사라지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1-06-02 11:11
조회수: 3023
 
한 떨기 장미와도 같이 사라지다


                                                                 조병화


                     인환이
                     너는 가는구나
                     대답도 없이 떠나는구나

                     1956년 3월 20일 오후 9시
                     31세의 짧은 생애로
                     너는 너의 시와 같이 먼지도 없이 눈을 감았다

                     시를 쓰는 것만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생이요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쓸쓸한 것도 아닌 것
                     외로운 것도 아닌 것
                     - 이렇게 너는 말을 했다
                     너는 언제나 어린애와 같은 흥분 속에서 인생을 지내왔다

                     지금 너의 앞엔
                     네가 사랑하고 아끼고 돈은 없어도 만나면 언제나 즐겁던
                     너의 벗들이
                     모두 모여 흐느껴 흐느껴 고개 숙이고 있다

                     너는 우정의 배치처럼 먼저 떠나가는구나
                     경쾌한 네 목소리도
                     흥분한 말 속에 흐르던 너의 시, 너의 시론도
                     정열적인 너의 고독, 너의 비평도
                     이제는 들을 수가 없구나

                     네가 없는 명동
                     네가 없는 서울, 서울의 거리 밤거리
                     네가 없는 술집, 찾집, 영화관
                     너는 다시 찾아볼 수가 없구나

                     1950년대 우리 젊은 시단은
                     항시 네가 이야기하던
                     "장미의 온도" 너를 잃었다

                     잘가라
                     무정한 벗이여 잘 가거라
                     너의 소원대로 너의 사랑하던 벗들은
                     지금 너의 묵묵한 관이 나가는 이 마당에 모두 모여들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멀고 쓸쓸한 것이라는데
                     편히 가거라
                     쉬어서 가거라
                     편히 쉬어라

                    
                                           조병화, 『서울』
          
  

         (...전략) 서울로 올라와서 대번 편석촌 (김기린 시인)이 박인환 시인을 소개했다. 얼굴, 코가 칼날 같고 맵시있는 청년이었다. 날카롭고, 재치있고, 눈치빠르고, 민감하고, 쾌활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기질의 시인, 신선한 시같은 인상을 주는 시인이었다. 그 후 나는 매일같이 명동에서 그와 어울리게 되었다. 이봉구씨와. 이봉구씨는 술을 많이 했다. 많이 했다기보다는 많이 즐겼다 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늘 술집에 있었다. 술집 아니면 다방, 다방 아니면 술집, 뱅뱅 그 언저리를 돌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명동에서 살았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있으면서 (수복 후엔 평화신문 문화부장). 우린 이봉구씨를 만나면 즐거웠다. 그 재치있는 말이 안주였다. 애수에 젖은 그의 인생철학이 프랑스 영화의 한장면 한장면처럼 우리를 젖어들게 했다.
    (...중략)
    박인환은 자만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서도 누구에게서나 돈을 꾸질 않았다. 누구에게서나 커피나 차를 얻어마시질 않았다. 술은 더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그 무렵 잘 가던 <동방문화살롱>엘 늦게 들렀었다. 기다리고 있던 박인환이 "여기다, 여기." 하면서 손을 번쩍들어, 다가간 나에게 꾸짖기나 하듯이 "너 왜 지금 나왔어, 빨리 나오지. 커피 한잔 하자. 마시고 싶어 몸 닳았다." 급한 말이었다. 이렇게 차도 사람 골라서 마셨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이었던가 (하긴 번번이 있었던 일이지만), 만나자마자 "너 돈 있니?" 하길래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다 내보였더니 반을 쓱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고맙다" 하는 것이었다. 돈도 이렇게 자기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만 이야길했다.
    이건 부산 피난지 광복동 거리에서의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1951년 여름쯤, 길거리에서 만나자마자 "병화, 너 <후반기(後半期)> 같이 안할래?>" 다그치게 물어온걸 "난 안한다." 한마디로 거절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한마디로 거절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학은 혼자 하는 거라는 거. 둘째, 문학은 작품이지 문학운동이 아니라는 거. 세째, 문학은 당파가 아니라는 거. 네째, 문학은 아는체하는 지식이나 그 유파가 아니라는 거. 다섯째, 문학은 생리적이라는 거, 지극히 그 사람의 생리적이라는 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특히 성격적으로 그들하곤 달랐기 때문이었다. 기실 그들이 문학의 형식이나 언어를 내세우는 운동파라고 하면 나는 어두운 내 내면세계를 배회하던 불행한 운명의 나그네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박인환과 나는 가까우면서 길은 달랐다. 서울 수복 후 몇년 좋은 시를 쓰다가 그는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위와 같은 조시를 그에게 바쳤다. 그의 장례식에서.
    제목을 <한 떨기 장미와도 같이 사라지다>라 하고, 고 박인환 시인 영결식에서 (1956. 3. 23) 이걸 반울음으로 읽었다. 그날은 장안의 예술인들이 다 모여든 것 같았다. 갑작스레 나보고 조시를 읽으라고 송지영 선생이 말하길래 길 건너 있는 동아일보사 신상초 논설위원실에서 한 40분 갈겨댄 것이다. 박인환 집은 광화문 비각 바로 그 뒷골목에 있었다. 묘지는 망우리 공동묘지, 묘비엔 이봉구씨의 제안으로 <세월이 가면>을 집어넣었다. 많은 일화를 여기 다 어떻게 수록하겠는가. 31세의 세월, 그는 압축한 단문(短文)처럼 살다가 떠났다.


                                                 조병화, 『떠난세월 떠난사람』, 둥지, pp. 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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