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62호 밤의 이야기·4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2-08-27 10:23
조회수: 2971
 
밤의 이야기·4

어느 날 내가
종로 네거리 하늘 꼭대기 양지 다방 한구석에서
불교를 이야기해 주는 선생과 같이
밤 깊이 도통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불교를 이야기해 주고 있던 선생은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따짐을 이미 가리지 않는 사람일수록
도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밤 깊이 마음의 자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종로 네거리 하늘 꼭대기 양지 다방 서울 한가운덴
실재처럼 시간이 자옥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실처럼 일체가 텅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리창 속엔 날개 접은 생명들이 끔벅거리고 있었는데
일체의 허虛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선생의 웃음소리
밤은 이미 그 자리를 잡아 침전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잎새를 추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종로 네거리 구름다리 꼭대기 가을이 지나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일체의 득실을 걷고 있었는데
시간은 이미 내 자릴, 일어서고 있었다

시집 『밤의 이야기』에서

    이 무렵 나는 나의 서울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많이 모여있는 경희대학교로 교직 생활을 옮겨 놓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중앙대학교에 출강을 하고 있었지만.
    지리학과의 김경성(金庚星)이라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시간강사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김경성이라는 교수는 일본 시대의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아주 학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벌써 세상을 떠났지만, 이 김경성 교수는 입담이 세고, 불교 신자로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아주 해박했습니다. 이분이 나에게 호감을 가져서 나는 아무런 이유없이 이분과 차도 자주 마시고, 술도 자주 마시곤 했습니다.
    이 무렵 나는 명동에서 종로로 생활 행동의 영역을 옮겨서 저녁이면 주로 양지다방, 아니면 금하다방을 이용하면서 그 뒤쪽에 있던 낭만(浪漫)이라는 비어홀(맥주집)을 이용하면서 쓸쓸한 문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

    어느 날, 나는 이 김경성 교수와 같이 경희대학교에서 퇴근하여 이 양지다방에서 많은 시간을 앉아서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거의 다 김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옛날이야기에 도취해서 듣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김 교수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늘 ‘죽음의 사자’(시간, 가을)를 옆에 동반하면서 그 시간을 좀 늦춰 달라고 미루어가면서.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자란다』, 문학수첩, 1995, pp 1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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