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823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11-12 12:32
조회수: 71
 
85 손
   뉴욕, 식스 애버뉴 45가 부근에서 졸업생들과

1980년 11월 17일, 밤
유화전 리셉션을 마치고, 우루루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뉴욕, 식스 애버뉴 45가 부근은
눈, 눈, 눈 캄캄한 눈발이다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고
취해서 따끈따끈한 볼, 볼에
부딪쳐 바스라지는 하얀 눈, 눈, 눈
바스라지는 눈발은 짜릿짜릿하다.
빌딩의 계곡으로 계곡으로 흐르는
네온의 불빛
그곳에서 나는 한 마리 깊은 바닷고기
인정의 물결을 탈 뿐
동서 남북이 캄캄이다
김군, 이군, 박군, 최군…… 나는 지금
어디로 가지
그저 따라만 오십시오
암, 그럴 수밖에. 지금 내겐 내가 없네
그저 눈물만일세
눈, 눈, 눈, 캄캄한 눈발 속에
그저 고마운 자네들의 뜨거운
손.

                         시집 『안개로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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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도 나의 제 25시집 『안개로 가는 길』(1981.9.15. 일지사)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1980년 11월 중순경에 나는 뜻하지 않게 뉴욕 한국 갤러리에서 초대전람회(그림, 시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화랑은 뉴욕 44가, 브로드웨이인가 하는 곳에 아담하게 차려진 전시장이었습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뉴욕 시와 그 근방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 그리고 서울고등학교 시절의 제자들이 참으로 많이 참관해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매일 저녁이면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는 전시회 오픈일에 모인 제자들과 술자리를 옮겨다니며 술을 마시던 광경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울고교 시절 나는 엉터리 선생으로 물리니, 수학니, 국어 작문이니, 하는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워낙에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어서 제 실력으로 이렇게 크게 성장을 하고, 성공들을 해서 이렇게 큰 문명한 나라에서도 대학교수니, 의사니, 변호사니, 사장이니, 회장이니 하는 것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람처럼 무서운 재산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교훈 그대로 ‘세계에서 그 이름을 날리고, 어디에 있으나,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으니, 교육처럼 무서운 힘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주는 술잔을 받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좀더 성의를 가지고 가르칠 것을, 하면서.
  사실 나의 서울고교 교사 시절은 나의 인생의 방황기였습니다.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지요. ‘Stray sheep(길 잃은 양)’이었지요. 길을 잃고, 길을 찾고 있었던 자학의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자학적인 자기 고통 속에서 나는 내 마지막 구원처럼 시를 찾고 시를 쓰고 있었습니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이니 『패각의 침실』이니, 『인간고도(人間孤島)』이니, 『사랑이 가기 전에』니, 『서울』이니,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니, 하는 시집들이 다 그러한 방황하던 시절 내 영혼의 ‘숙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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