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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한 우주가 떨어진다
서로 모순되던
희로애락의 계절이
스스로가 겪은 대로, 그만치
하나의 맛으로 엉겨서
적막한 천지로 떨어진다
폭풍의 계절도
쾌청의 계절도
하나의 우주가 되어 떨어진다
스스로의 무게로
대학 캠퍼스(인하대학교)의 숲을 거닐다가 열매 하나가 툭 어깨를 치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문득 이러한 즉흥시가 하나 얻어졌다. 동시에 『열매』라는 제목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다 열매다. 열매 안에는 하나의 맛과 자양이 들어 있지만 그 맛과 자양은 실로 희로애락의 계절이 엉겨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긴긴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한다. 봄은 꽃피는 계절, 눈부신 희열의 계절, 환희의 계절, 화려한 색채의 계절, 벌떼들이 잉잉거리는 바쁜 계절, 생식과 생산의 계절, 그 생명의 계절이 아닌가.
그리고 여름이 된다. 일단 수정된 꽃들이 작은 열매로 무럭무럭 자라는 계절, 성장의 계절, 약동하는 계절, 흡수의 계절, 태양의 계절, 성숙의 계절이 아닌가.
그리고 벌레와 싸우고, 비바람과 싸우고, 폭풍우와 싸우고 번개와 천둥치는 태풍과 싸우는 계절, 그 투쟁의 계절이 아닌가. 실로 그 생존경쟁의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이 온다. 이 모진 것들과 싸우고 견디어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가을을 맞이한다. 가을을 맞이하여 스스로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무게로 하여 떨어지는 것이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것들이 하나의 맛으로 되어, 혹은 자양으로 되어 하나의 열매로서의 우주를 만들어 떨어지는 것이다.
어떤 것은 만들다가 벌레에 져서 채 열매를 만들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것도 있다. 혹은 거진 만들었지만 완전히 다 맛이 들지 않은 채 떨어지는 것도 있다. 그리고 힘과 지혜와 인내가 있는 것들만이 최후의 자기 맛과 영양을 완숙하여 스스로 떨어지고 싶은 날, 그 날을 택하여 떨어진다.
이렇게 인간도 스스로 열매를 만드는 한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실로 인생도 희로애락의 그 계절을 겪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희로애락을 이겨서 남은 자만이 스스로의 열매를 만들어서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사라져 가는 것이다.
- 「자기 안에 ‘숨겨진 우주’를 만들어야 한다」부분,『내일로 가는 길에』, 영언문화사, 1987 pp 224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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