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4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3-02-17 12:31
조회수: 344
 

서로 비밀로


정들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 하나,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내리는 날 떠나는 사람
비내리는 날 떠나는 사람
밤에 떠나는 사람

떠나는 날, 떠나는 시간을 택하여
눈을 감으면
몸은 허드레가 되어 세상에 버려지고
순식간에 수억만 리
혼백은 자취를 감춘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잘 먹던 사람도
못 먹던 사람도
혼백이 떠나면 추악한 시체

실로 그 혼백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마침내 비밀이나 되는 듯이
약속이나 한 듯이
정을 끊고
숨어서 사라지는 그 몰인정

정들어, 잊을 수 없던 사람들이
순간, 순간,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그건 비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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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노트

시는 나에게 있어서 이별의 인사였습니다. 그와도 같이 이별은 나의 시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만나고, 수없이 작별을 하고, 실로 그 이별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별처럼 절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만나는 것처럼 공포가 없었습니다.
만난다는 것은 곧 이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나는 것처럼 기쁜 것은 없지만 또한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수시로 만나고 수시로 헤어지는 이 세상 이별처럼 나에게 아픈 슬픔을 주는 것이 또 있으랴.
이러한 이별 중에서 죽음이 주는 이별처럼 절실한 것이 어디 있으랴. 죽어서는 어디로들 갈까. 하나 같이 비밀처럼 떠나고 떠나고 떠나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천주교를 믿던 사람들은 천주교의 하늘로 신부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가고, 예수교를 믿던 사람들은 예수교의 하늘로 목사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가고, 불교를 믿던 사람들은 스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가고, 회교를 믿던 사람들은 회교의 사제들의 안내를 받으며 그 회교의 하늘로 떠나겠지만, 나는 이 세상 떠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
어머님의 하늘로 가겠지만, 지금까지 믿고 써왔던 시들이 그 길로 나를 잘 인도해 줄는지.
어머님은 실로 나의 종교이며, 시는 그 어머님의 하늘로 나를 인도해 주리라 믿고 있는 나의 길 안내자로 깊이 생각을 하고 있지만, 과연 그렇게 나를 인도 해줄는지.
나의 시는 나의 길이옵니다. 어머님의 하늘로 가고 있는 길이옵니다. 그 안내인 올시다.
수많은 모래알 같은 언어들이 나의 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들은 근심이 많은 슬픈 모래알들이었습니다.
그 슬픈 모래알 같은 언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길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언어들의 영혼에 이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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