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54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07 17:44
조회수: 156
 
16. 분수 (噴水)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
        저녁 노을에 무지개 서는
        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향수는 없어도 좋다
        긴 치맛자락 그대로의 냄세를 피어라
        빨간 옷고름이 노을 바람에
        다시 보고 싶은 편지 조각 같이 휘날리는
        아,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다오
        분수야 네게 어울리는 잔디밭에 영 있어라
        너는 외로운 사랑을 부르지 않아도 좋다
        외로움은 언제나 나에게 주어라
        노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수줍어하는 네 옷고름 같은 그리운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하두 그리워 네 곁을 소리 없이
        오고가는 그 마음을 영 나에게 주어라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일랑 말라
        차라리 부끄러워하는 입김을 내어
        그리움일랑 영 나에게 다오.
                                                  
                                                       시집 『하루만의 慰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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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도 말했듯이 내가 이렇게 속으로 내 인생을 앓고 있을 무렵, 참으로 많은 정치꾼들이 완장을 달고 거리를 판치고 다녔습니다.
  〇〇동맹, 〇〇동맹, 〇〇협회, 〇〇협회, 실로 수많은 동맹원들이 독립만세, 찬탁만세, 반탁만세, 자유민주주의만세, 공산주의만세,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사회는 혼잡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거리에서 유학생동맹(일본에서 공부하던), 학병동맹의 대열을 목격하고는 더욱 나의 머리는 혼잡스럽게 번져가곤 했습니다.
  내 눈에 띄었던 그들의 동경에서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거의 가 다 일본에선 일본인 학생 노릇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엔 가지 않고 그저 학생 모자만 쓰고 다니던 부실한 학생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학생 아닌 학생들 같은 그들의 모습이 나를 심히 어지럽게 하곤 했던 겁니다. 그들이 이렇게 애국자로 변모해서 거리를 활보할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참으로 우습게만 보이곤 했습니다.
  이 무렵 나는 덕수궁 한적한 곳을 자주 찾아가서 혼자 암담한 나의 미래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분수가 가늘게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 분수(噴水)와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항상 인간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곳에서,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념 아닌 체념의 안정스러운 철학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정열이다, 정열이다, 절규이다, 절규이다 할 것이 아니라 정열보다는 지혜로, 절규보다는 고요한 사색으로, 소리 나지 않는 굳은 판단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깊이 들어가곤 했습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장소에서, 자기에게 어울리는 모습으로, 자기에게 어울리는 실력으로, 자기에게 어울리는 꿈으로, 자기에게 어울리는 인생의 소득으로, 자기에게 어울리게 살아가는 인생,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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