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주金光洲씨와 그 주변
-----------------------------------------------------------------------------
김광주·박인환·이진섭·유호·이해랑·유두연·윤용하·한노단·이봉구·김수영·김영주·이순재·이명온·
조경희·이인범·조애실·조영암·박연희·김양수·김성민·장만영·이경성·권영숙·방용구·최완복·
이석곤·이병일·한창우·오종식·박계주·최호진·서임수·김내성·정한숙·임인규
-----------------------------------------------------------------------------
향원鄕苑
--명동소묘明洞素描
향원은 좋은 술을 주는 집이다
향원은 즐거운 우리 벗들이 술을 나누러 가는 곳이다
향원은 명동 외떨어진 곳에 홀로 있는 집이다
이집의 주인 향원부인은 학鶴의 태생이다
학은 내릴 자리를 가려서 내린다는 새 이름이다
향원부인은 먼 목소릴 한다.
학은 연백평야, 당진평야에 무리를 쳐서 내린다는
보통학교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그런데 무리를 잃은 학은 어떻게 살까.
시인의 이야기다
학이 아닌 새와 사귀어서 살지
시인의 이야기다
술을 들자 가물이 낀 인생의 한여름
떡갈나무 잎새 아래
고운 약수와 같은 우리 술을 들자
시인의 이야기다.
향원은 좋은 술을 주는 집
향원부인은 혼자서 도는 학이다.
이 시는 1957년 11월에 출판한 나의 제6시집 서울에 수록했다. 지금 이 학부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로스앤젤레스에 역시 아름다운 식당을 차려서 며느님에게 맡기고 골프를 치며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호통은 쳤지만 나를 아껴주시던 한창우 사장도 오종식 주필도 다 세상을 뜨셨다. 오종식 선생은 일본 동양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신 분, 그 방대한 장서가 내가 부총장으로 있을 때 인하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석천문고(昔泉文庫)로 기증되었었다.
김내성씨와는 자주 포장마차집에서 참새구이와 따끈한 정종을 마셨다. 김내성씨는 우리나라에서 요새 유행하는 추리소설을 정립시킨 선구자라 할 정도로 탐정소설에서 성공을 한 인기작가였다. 지금은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탐정소설로 불리고 있었다. 술 한 잔만 돌면 김내성씨는 왜 내가 대중 소설가냐고, 대중소설을 까는 순수문학가들에게 불평을 쏟아놓았다. “너희들은 뭐냐, 독자들이 없는 문학이 문학이냐, 소설이나 제대로 쓰라고 해라.”는 식으로 만만한 나에겐 터놓고 말을 퍼부었다. 김내성씨는 그렇게 나를 좋아했다. 김내성씨는 그 무렵 경향신문에 실락원의 별을 연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주 경향신문 문화부에서 만나곤 했다. 대단히 성실한 분이었다. 이 연재소설은 온 전국을 휩쓸 정도로 대인기였다. 장안이 실락원의 별로 도취할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구나 자기 소설에 대한 옹호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기 문학론으론 순수이고 대중이고가 없다는 거다. 많이 팔리면 대중문학이고, 안 팔리면 문학성이 높은 순수문학이고, 이따위 거지 같은 문학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 톨스토이의 문학도 대중문학이란 말인가, 열을 올리며 잔을 돌리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다가 실락원의 별을 연재중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1958년 2월 19일, 이 소설은 너무나 인기여서 김내성씨의 따님이 계속 집필하여 완성을 시켰다. 경향신문은 고인을 기념하기 위해서 ‘김내성문학상’을 제정했다. 그 제1회 상을 정한숙(鄭漢淑)이가 받고, 제2회 상을 유해준(兪海濬:兪湖)이가 받았다. 이 상은 제2회로 끝나버렸지만 지금까지 계속되었더라면 우리나라 추리소설계에 있어서 빛나는 상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술이 어지간히 돌면 이진섭은 프랑스 샹송 ｢장미빛 인생｣ 아니면 ｢세월이 가면｣을 일류가수 이상으로 기분을 내서 노래불렀다. ｢장미빛 인생｣은 그 무렵 방금 명동에 들어와 유행하던 노래였고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시에다 이진섭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였다. 이진섭은 참으로 재주가 많은 친구였다. 경복고등학교(제2고등보통학교)를 나오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서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를 도중에 집어치운 재능아였다. 아마 국대안 반대 소동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방송국에 나가면서 여러 예술 장르에 손을 댔다. 특히 영어에 능통했다. 따라서 해외 소식에 빨랐다. 우리보다 한발 먼저 해외 소식을 알고 있었다. 시에다 즉석에서 곡을 붙일만한 음악의 재능, 그는 고전 음악에도 도통하고 있었다. 당시 클래식의 전당이던 ‘돌체’ 다방을 들락거리며 우리들에게 클래식의 향기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진섭의 주정은 참으로 끈질겼다. 김광주씨의 유행말대로 아무리 취했어도 ‘반 되만 더, 반 되만 더’ 하면서 통행금지 임박 직전까지 사람의 간장을 달랑달랑하게 했다. 그러던 중 나는 한 사실을 발견했다. 옆에 사람이 없으면 하던 주정도 딱 그치는 걸 발견했던 거다. 그리하여 그와 같이 술을 마실 땐 그 수법을 쓰곤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면 슬쩍 숨어 버리는 거다. 그러면 그렇게 노래부르고, 따지고, 횡설수설하던 그도 제 물건 다 차려가지고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훑어보곤 자기 길 찾아서 나서는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들키면 야단이다. 다시 잡혀서 술을 마셔야 하고, 그 주정을 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술집에서 나와 그가 차를 타는 걸 볼 때까지 그의 눈에 띄어선 안 되는 거다.
그땐 오늘날처럼 같이 술을 마시다가 슬며시 먼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다 같이 일어나서 다 같이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그리고 친구가 잘 가는 걸 보곤 헤어지곤 했다.
그 재능, 그 노래, 그 재담, 그 악의없는 주정, 시대의 선량한 피해자, 이진섭도 세상 먼저 뜨고 먼 세월이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