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890호 (『세월은 자란다』 이후의 이야기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2-07-02 11:31
조회수: 28
 
151.  1996년 2월 8일 이사를 했다. 슬픈 작별처럼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수복 이후 근 40여 년을 살던 혜화동 107번지에서 명륜동 1가 43번지 나산빌라 203호로 이사를 했다. 근 40여 년을 같이 살았던 늙은 대추나무를 쓰다듬으면서,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면서, 묵은 나무 줄거리를 다독거리고 집을 나왔다.
  40여 년 전에 심은 작은 나무가 이렇게 나와 같이 세월을 늙어 왔으니, 얼마나 이 작별이 서운한 것인지.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변하는 것을 변하는 대로 살아가자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철학을 살아왔다. 실로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것이 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내가 어려서, 그러니까 아홉 살 되던 해 이른 봄, 어머님과 같이 서울로 이사를 와서 아현동으로, 현저동으로, 냉천동으로, 북아현동으로, 혜화동으로, 인천 관동으로, 부산 송도(암남동)로, 잠깐잠깐 어려운 살림을 하다가 아주 서울 혜화동에서 사십여 년 같은 장소, 같은 집에 살다가, 내 인생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이 나이 일흔여섯에 명륜동 작은 아파트형 빌라로 이사를 했던 거다.
  지금까지는 늙은 부부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지만, 이제 일흔네 살인 늙은 아내와 나와 단둘이 살게 되니, 늙은 부부라는 실감이 들면서 처량한 생각도 들고, 슬픈 생각도 들고, 매우 쓸쓸한 느낌에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일생이 혼자 사는 단독자의 고독을 살아왔지만, 그 훈련된 고독을 가지고도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이 새삼 들곤 했다. 실로 ‘죽음도 따라가지 못하는 고독’이 이 인생인 것 같다. 이곳에서 또 얼마를 살 것인지, 가숙(假宿)의 인생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면서.
(『외로우며 사랑하며』,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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