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805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9-08 14:21
조회수: 1
 
66 이부스키

이곳은 일본 열도 규슈
동지나해 넘실거리는
이부스키 해안
검은 모래 사장
솟는 온천

찾는 벗은
자릴 뜨고
캄캄
고요한 우주
따가운 곳에
구름이 뜬다

사람은 한 번
자릴 뜨면
하염없는 작별
머리 속에서
세월을 묵어 가는
화석
화석이지

화석에 묻힌
그 목소리
운명을 울던 여인의 목소리
생명의 벌레 소리
살기 때문에 부르는
목소리
찌, 찌

그 목소리 들으며
이부스키 미야가하마
뜬 세월
빠른 물결

검은 돌 주우며
작별을 한다

나와 나
인간은 혼자 남는 거지.
                                    시집 『먼지와 바람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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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도 시집 『먼지와 바람사이』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나는 1945년,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 재학중, B29의 동경 폭격이 심해 지자, 죽어도 어머님을 한번 뵈옵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억지로 서울(경성) 나오는 기차표를 얻어가지고 서울로 일단 나왔습니다.
  동경에서 탄 열차는 마침내 가고시마(九州 鹿兒島)로 내려가는 피난민 열차였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득히 찬 초만원 열차였습니다. 6ㆍ25 시절의 부산행 피난민 열차를 방불케 하는.
  꽉 차서 몸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앞에 나타난 한 여자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서서 가는 내 가슴에 그 여학생의 젖가슴이 밀착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저 그대로 내 가슴과 그 여대생의 젖가슴은 밀착한 대로 가는 수밖엔 없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 입술이 닿을 정도로.
  한 서너 시간이 아무 말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먼저 그녀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이 말문으로 대화가 시작이 되었던 겁니다. "경성(서울)까지 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경성농업학교 교장이 제 삼촌입니다. 조선 청년들의 교육에 힘 많이 쓰시고 계십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 가면서 거진 기차가 교토(京都) 부근까지 지루하게 왔을 때 이런 이야길 하면서 나의 의견을 물어 보았습니다.
  자기는 가고시마 여자고등을 나왔다는 것, 가고시마 여고시절, 가고시마에 있는 제7고등학교 학생과 연애를 했다는 것, 그 학생이 동경제국대학 법과로 진학을 했기 때문에 자기도 부모님의 권유로 동경여자전문학교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는 것, 서로 공부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동경에서도 서로 멀리 떨어져서 하숙을 했다는 것, 그러다가 자기 애인이 학도병으로 출전하게 되어 하룻밤을 같이 동침을 했다는 것, 그러자 애인은 군대로 가고, 혼자 동경에 남아 있는 것이 허전하고 죄도 진 것 같아서 일단 가고시마에 가서 부모님들을 만나보고, 북해도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으로 갈 생각이라는 것 등등을 사근사근 진실되게 나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들으면서 그녀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위로의 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길 하면서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헤어졌습니다.
  그 후 오키나와 전투가 터지기까지 많은 편지가 오고 갔었습니다. 그 후 그녀를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가 1972년, 내가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학장이 되고선 용감하게 그녀와 그녀가 결혼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그녀의 남편을 만나러 이곳 가고시마 현 이부스키(指宿)까지 찾아갔던 겁니다.
  한가한 어촌이라고만 생각하고 갔던 이부스키의 미야가하마, 그녀의 고향은 지금은 어마어마한 온천 도시로 변해서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사메지마 다카코(鮫島孝子, 鹿兒島縣 指宿都 指宿 宮浜)는 이렇게 해서 다시는 만날 수가 없는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인생엔 많은 해후(邂逅)가 있습니다만, 동경에서 시모노세키까지의 이 짧고도 길었던 해후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해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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