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93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7-31 14:55
조회수: 21
 
54 편운재 기(片雲齋 記)

보이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눈이 오가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사람의 목소리 들리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작별이 바쁜 이 무상無常 부근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이 세상에선 평생토록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하늘 한 자리 한 생각 묻어
있을 수 있는 동안, 그냥
떠 있으려 했어요

차례가 있는 자리, 차례 속에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차례, 가벼이
떠나려 했어요

번창의 폐허
이 이웃 부근, 버려진
영혼의 의자
시간에
앉아

보이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눈이 오가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사람의 목소리 들리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시집 『시간(時間)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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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제 13시집 『시간(時間)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1964.10.30. 양지사)에서 한 편 뽑은 작품입니다.
  이 시절 나는 정음사 최영해(崔暎海) 사장, 양문사 변(邊) 사장(양문문고를 출판하고 있었음), 춘조사 윤영(尹暎) 사장, 장만영(張萬榮) 시인 등 출판사 사장들하고 잘 어울려 다녔습니다.
  장만영 시인은 자기가 경영하던 산호장 출판사가 38선이 묶이는 바람에 백천(白川)에서 오던 자금이 끊기어(황해도 백천온천장이 장만영 시인의 고향이고 이곳에서 야채를 재배, 서울에 운반하여 팔고 있었음) 출판사를 그만두고 윤 사장이 경영하고 있었던 춘조사 출판사에서 편집장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윤 사장과 장만영 시인이 시집을 내자고 했습니다. 좀 작품 수가 달리고 있었습니다만, 몇 편 보충해서 출판하기로 했습니다. 시집의 이름을 『내일(來日) 어느 자리에서』라고 정해서.
  우리 나라 60년대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했지만 문학에 있어서도 무질서하고, 중구난방이었습니다. 특히 시단에서는 소위 난해시(難解詩)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악성 유행성 전염병처럼.
  이 판국에서 어느 잘난 척하는 시인이 쉽게 쓰는 시라고, 어느 글에서 나의 작품에 흠집을 내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상해서 ‘내일 어느 자리에서’ 다시 보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을 그렇게 달았습니다. 그 글을 우습게 여기면서.
  나는 평소에 무상(無常)의 사상을 가지고, 매사를 응시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무상이며, 언젠가는 변화해서 사라진다고. 사람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허무하면서 실존적인 생각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며,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자기 생애, 그 자기 역사, 그 자기 존재뿐이라는 무상철학적(無常哲學的) 실존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살아왔던 겁니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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