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의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17호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0-08-25 15:51
조회수: 44
 
통장

  한때 나는 통장을 갖는 것을 심히 창피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민이 그런 통속적인 돈의 통장을 가지고 다니나 하는 선비정신에 젖어서 돈을 지갑도 없이 그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썼었다.
  그때만 해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돈을 아주 멸시하고 살았었다. 지저분한 거 같기도 하고, 시인다운 소지품이 아닌 거 같이 통장을 아주 낮게 보고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지만 제자정도 나이의 은행원과 길에서 인사하게 되었다. 그분은 나를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술집에 내가 자주 들락거렸을 때였으니까 그저 술집에서 만난 사람이겠지 하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지금은 모 투자회사의 부사장으로 있지만.
  그분이 권하는 말이 있었다.
  통장생활을 하시라고. 그땐 핑 웃어버렸지만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하곤 해서 제자정도의 젊은이도 되고 해서 그분이 하급 은행원으로 있었던 은행에 통장거래를 했다. 통장거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통장을 가지고 다니니까 뭔지 내가 안갖을 것을 가지고 다니는 거 같은 비밀을 지니게 된 느낌을 가졌었다. 실로 비밀이었다. 나에겐 큰 비밀이었다. 부담스럽고 시인의 체면에 관한 거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몇 달이고 있다가 은행에 가보면 통장에 소위 이자라는 돈이 기록되어 나오곤 했다. 신기했다. 돈이 새끼를 치는 것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그렇게 신기한 노릇을 실감하곤 쓰다 남은 것들을 통장에 넣기 시작을 했다. 그 분을 돕는 이유도 될 것 같아서.
  그러자 남몰래 자주 은행 출입을 하게 되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까 사방을 살피면서.
  한동안 그렇게 소위 시중은행을 출입하다가 그분이 모 단자회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분만 믿고,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하던 일이니까 자연 나도 그 통장의 돈을 그분이 자리를 옮긴 단자투자회사에 옮기기로 했다.
  그분의 이야기론 이자가 은행보다는 좀 높으나 좀 모험성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자기를 믿으라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오히려 내가 얼굴이 붉을 정도로 부끄러워졌었다. 돈 이야긴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몇 달 후에 그 분을 만날 겸, 술 한 잔 할 겸 단지회사에 살금살금 나타나 보니 통장의 이자가 사뭇 불어난 거 같은 흐뭇한 생각이 들곤 했다.
  과연 많이도 불어났다 하는 생각에 되도록 절약, 절약해서 그 이자가 불어나는 재미로 입금을 하고 입금을 하곤 했다.
  물론 그때만 해도 쓰다 남은 것을 한푼 두푼 입금을 했지, 좀체로 돈을 통장에서 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이젠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젠 내가 나를 위해서 그 단자회사에 출입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어느 때부터인가 생기기 시작을 했다.
  돈도 생기는 대로 넣기 시작을 했다. 돈이 생겨봤됐자 원고료 몇 푼이지만, 그 몇 푼을 기념하기 위해서도 입금시키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사가나, 교가나 하는 것의 작사 의뢰 같은 것이 들어오면 좀 큰 원고료가 들어와서 제법 저축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해서 일 년, 일 년 통계를 내보면 아무리 금융이자가 싸다고 하지만 제법 만족스럽게 돈이 돈을 새끼쳐가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던 것도 정년퇴직이 되었다. 나는 좀 성미가 급하고 참을성이 없어서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버렸다. 그것도 이 통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죽을 때까지 나를 살려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글쎄 그렇게 될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밖에 살아갈 길이 없지 않은가. 작게 먹으면서.
  하여간 이렇게 해서 통장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통장 덕분에 지금 나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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