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의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05호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0-05-29 14:28
조회수: 144
 
溫氣의 어둠 속에서

  봄은 먼저 가벼운 열패감(劣敗感)에 취해, 공허한 고독 속으로 나를 방출시킨다. 아니 부끄러운 내 가난한 나상(裸像)이 화려(華麗), 번잡(繁雜), 풍염(豊艶)한 계절 속에 그냥 초라하게 노출되어오는 느낌이다.
  한국의 밤처럼 마냥 길기만한 긴 동절엔 퇴적된 인간과 생존의 먼지 속에 끼어 이럭저럭 숨어서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하늘이 풀리고 대기가 풀리고 대지가 풀리고 마을과 도시가 풀리고 길이 풀리고 창이 풀리고 마음이 풀리는 봄이 되고 보니 별안간 나에겐 일체를 상실한 마음 - 그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토마스 하디의 시 「아직 탄생하지 않은 빈부의 아들」처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머니 배 속에서 그저 태어 나와 버린 하나의 생명체처럼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그 마음. 확실히 봄은 나에게 그러한 온기의 어둠을 주는 것이다. 이 온기의 어둠 속에서 나는 매년 스스로의 따사로움을 스스로 발견해서 그 속에 침재해야만 했고 그 침재하고 있는 어두운 따사로움 속에서 실은 가을을 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내 것이 못되는 힘과 빛 생명의 홍수, 염염한 세대와 계절이 숨차게 지나가는 그 밑에서 깊이 고요하게 스며드는 또 하나의 누락(漏落)된 생명 그 목소리와 나는 이웃하여 나에게 주어진 생명과 시간, 그 온기의 어둠을 다하려 하는 한적한 실존의 봄 마음인 것이다.
  봄은 밖에서 가벼운 패배에 취해 나에게로 돌아오고 있고, 안에선 먼 가을을 향해서, 이미 나는 나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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