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조병화의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690호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0-03-03 15:46
조회수: 139
 
머지 않아 봄이 오려니


  머지않아 봄이 오려니 하면서 이 춥고 매서운 겨울을 참고 지내고 있다. 추워도 한도가 있었지, 하면서 견디고 견디곤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겨울은 나 같은 참을성 없는 사람에겐 좀 추운편이다.
  그런데 1월 지나가며 2월이 오는 요즘은 벌써 봄 냄새가 더러더러 나곤 한다. 일전에 부산으로 초청강연을 갔다 왔다.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갔다. 나는 지방 강연여행을 다닐 땐 꼭 기차를 이용한다. 아무리 편리하다해도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기차를 이용한다. 여행기분을 내기 위해서이다. 그 여행기분 속에서 시릐 재료를 얻기 위해서이다. 여행은 실로 나에게 있어서 큰 기분전환이며 작품 제작의 동기가 된다. 말하자면 열차는 이동하는 나의 작업실이라 하겠다. 요전에도 다음과 같은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그 이동하는 작업실에서(기차 안에서).

     유라시아 한반도 남부 해안도시로
     강연을 떠난 일월 급행열차 차창풍경

     일월 하순, 아직 겨울철인데도
     새마을호 넓은 유리창 밖엔
     논밭길에 파릇파릇
     벌써 봄이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 산기슭 양지 바른 곳엔
     이미 와 있는 봄이
     소곤소곤 어깨들을 비비며 모여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 중간쯤 되는 언덕 복숭아 과수원엔
     연한 어린 가지들이
     찬바람을 쏘인 어린이들의 손목처럼
     발가스레이
     파란 바람이 지나가는 겨울 하늘에
     가물가물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디선지 말똥가리 한 마리가
     달리는 차창 밖으로
     훅, 날라 갔었다.

     순간, 한 여인의 얼굴이 확,
     한없게 그리움처럼
     황하게 그곳에 떠올랐었다.

     아, 나는 지금
     그렇게 한없는 그리움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아직도 떠돌고 있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손쉽게 그저 「1월 여행」이라 했지만 실은 한없이 그리움을 사는 나의 인생 방황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
  나의 인생은 한 마디로 긴 방황, 그 꿈을 찿아서의 끊임없는 모색의 여행이 아니였던가.  지금 나의 나이가 고희 부근에 와있지만, 그 고희 나이에 들어 있는 정신은 청년시절 그대로이니, 이걸 어찌하리.
  인간은 늙으면 늙을수록 늙을줄을 알아야 하는 일, 나도 이젠 적당히 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데도 이렇게 항상 무었을 더 더 기대하면서 그 미지의 동경의 세계를 그리워하고만 있는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봄이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이 추운 겨울을 하루하루 이겨나가고 있다. 동시에 이제 봄이 오면 하는 약동하는 희열을 생각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나는 계절 중에서 2월을 제일 좋아한다. 시인들은 거의가 가을이 좋다고 하고 그 가을도 늦가을이 좋다고들 하지만 나는 봄이 가까이 와 있는 이 차가운 2월을 좋아 한다.
  아직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지만 머지않아 풀릴 그 2월의 차가움, 그 계절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골 양지 바른 곳에, 산골물따라 피어나기 시작하는 버들강아지, 그리고 그 다음을 이어 피기 시작하는 산수유, 그 노란 꽃들, 그 향기, 이 무렵이 되면 나의 기분은 미쳐버리고 만다.
  버들강아지, 산수유 피는 게절, 아! 신이여, 나에게 더 더 그들을 노래 부를 수 있는 재능을, 그 감각을 주서서 하고 기원하고 싶을 정도로 나의 기분은 들뜨게 된다.
  겨울이 차고, 추울수록 이 2월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와 매한가지로 우리들 인생도 참으로 참을수록,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리우면 그리울수록 그 미지의 그것이 다가올 때 더 더 황홀해지는 것이 아니가 한다.
  나는 생전 기쁜 일, 쓰라린 일이 있어도 기쁠 때 그리 기뻐하지 않고 쓰라릴 때 그리 쓰라려 하지 않으며, 그저 그런 거 되도록 이렇게 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2월, 봄이 머지 않아오는 계절이 되면 그 약하기 시작하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속으로, 안으로 안으로, 누루면서, 감추면서 태연하게 사는 것 같이 살아왔지만 속으론 대단한 기분의 요동을 살아오곤 했다.
  인간은 좀 쓸쓸히 사는 게 좋다. 여러 가지를 깊이 생각하며, 깊이 느끼며, 깊이 깊이 사는 맛을 음미하며 사는 것이 좋다. 들떠가지곤 이런 아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깊이 깊이 가라앉아서 깊이 생각하며, 깊이 느끼며, 깊이 음미하며 좀 쓸쓸히 살아가는데 알맞은 계절이 이 2월이라고 하겠다.
  가장 충만하면서 가장 비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계절, 그 계절이 바로 2월이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누구나가 이 2월처럼 차분히 생각하면서 느끼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머지않아 그 화려한 봄이 오겠지, 이렇게 약동하는 기분을 속으로, 속으로, 깊이 간직하면서.
  참으로 우리 주변에는 상상할 수 없이 가난한 사람이 많다. 그런 것을 TV화면을 통해서 요즘 나는 많이 보아 왔다. 그럴수록 참으로 머지않아 그 봄이 오겠지 하는 이 2월같은 생각으로 살아나갔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시간속에 지은 집 』  1990.5.20. 인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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