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092호 (『떠난세월 떠난사람』)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4-06-07 16:45
조회수: 93
 
낭만시절과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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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방·임영방·김수영·박인환·김소운·김광주·송지영·최영해·권영숙·신상주·원응수·정하룡·
박창해·김동욱·이가원·양주동·오화섭·이군철·이헌구·이해창·이석곤·방용구·이태극·이진구·
김진섭·박노식·박노춘·남광우·김민수·양재연·이동림·김기동·이근삼·박은수·김붕구·전광용·
정한모·정한숙·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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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제13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를 1964년 10월, 새로 시작한 양지사(良知社)라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했다. 양지사 출판물의 제1호가 된다. 이 출판사 대표는 임명방(林明芳) 교수였다. 임명방 박사는 당시 한국외국어대학 이탈리아어학과의 과장이었다. 지금은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임박사는 해방 전 인천중학교(일본인 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해방을 맞고, 이어서 6년제 인천중학교에서 계속 공부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상지대학(上智大學)에서 사학(史學)을 전공하고 이탈리아로 유학, 그레고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임 교수의 형님이신 임영방(林英芳) 교수는 유명한 미술평론가, 서울대학교 미학과 교수이며 불란서 파리 대학에서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재사들이다.
임영방·임명방, 두 교수는 참으로 드물게 보는 아름다운 형제들이다. 우선 성격이 뚜렷하고, 개성이 뚜렷하고, 행동이 뚜렷하고, 학문이 뚜렷하고, 꿈이 뚜렷하고, 그 경력이 뚜렷했다. 이 두 형제는 술도 그렇게 멋있게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양지사에서 시집을 출판할 무렵, 나는 임영방·임명방, 두 형제교수를 따라서 종로네거리 모퉁이에 새로 생긴 ‘종로의 낭만의 집’이라는 비어홀에서 술을 마셨다. 개점 초기라 그랬는지 텅 빈 홀이 늘 써늘하기만 했다. 이곳에서 나는 구라파 유학생들하고 많이 인사하게 되었다. 임영방·임명방, 두 형제 교수들을 중심해서 그 무렵에 불란서나,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쟁쟁한 인재들이 거의 저녁이면 이 비어홀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다 대학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술이 셌다. 워낙 임 교수 두 형제가 술이 셌기 때문에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해서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놀랐던 것은 그들이 하나도 외국어를 쓰지 않는 점이었다. 대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교수들하고 술을 마실 땐 빈번히 그 외국어, 영어가 생활용어처럼 쏟아져나오곤 했지만, 이들 구라파에서 돌아온 교수들하고 술을 마실 땐 한 번도 그 외국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실로 서로 무슨 약속이나 한 거처럼 외국어를 쓰지 않았다.
이런 점 참으로 편안했다. 젊은 교수들의 입에서 습관처럼 흘러나오곤 했던 영어들, 그것에 어딘가 모르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곤 했던 술 좌석의 분위기, 그런 것에 비하면 이곳 구라파 유학생들의 술좌석은 그대로 하나가 되는 낭만과 학문과 인생과 깊은 생각들이 흐르고 있는 분위기였다.
왜, 그렇게도 다를까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 그들의 젊음에 항상 흡족히 빠져들곤 했다. 깊은 술, 깊은 인간미, 그리고 몸에 배어들어 있는 그 학문과 낭만, 나는 그곳에서 나의 인생의 젊은 숲을 찾곤 했다. 그들은 건조한 나의 영혼에 윤택한 깊은 숲의 그늘을 주었었다. 그들은 그 옛날 나의 중고등학교 교사시절의 제자들이라 하지만 어느새 쑥, 쑥, 자라서 이렇게 멋있는 수림을 이루고, 이렇게 나에게 내가 이루지 못했던 그 학문과 낭만의 숲을 제공해주고 있는 거다. 생각하면서 나는 무한히, 끝없이, 그들에게 말려들곤 했다. 흐뭇하게.
이것이 초기의 ‘종로의 낭만의 집’의 나의 풍경이었다. 시작할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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