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35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2-12-06 12:35
조회수: 39
 

출발


저 봉우리를 올라가야
해돋이를 보겠기에
나도 미투리를 삼아 신고
신작로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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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詩想노트
지금부터 요청에 의하여 시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리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나의 시들은 두서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나의 옛날 시집에서 뽑아낸 것들입니다.
이곳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출발'이라는 시는 내가 시를 쓰기 이전의 것입니다.
나는 해방이 되던 해 일본 동경에서 돌아와 나의 모교이었던 경성사범학교 물리 화학 준비실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8ㆍ15 조국 해방이 되어 미군들이 진주, 미군정을 펴서 9월 1일부터 정식으로 개학을 한 경성사범학교 물리 선생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경성사범학교는 국대안(國大案)이 발표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교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 국대안 찬성파(우익)와 국대안 반대파(좌익)가 서로 대립을 해서 극렬한 정치 싸움이 되었습니다. 그 통에 내가 경성사범학교 다닐 때의 영어 선생으로 계시던 신기범(愼驥範) 선생께서 학생들의 테러로 세상을 떠나게 되셨습니다. 신기범 선생께서는 그 당시 사범대학의 본학장으로 계셨습니다.
나는 이것이 싫어서 잠시 6년제 인천중학교 물리 선생으로 초청되어 갔었습니다. 인천중학교에 부임하던 학기엔 상급 학년의 물리 선생을 했고, 다음 학기부터는 하급 학년의 대수 선생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의 부족으로 담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담임하던 학급생들에게 용기와 꿈과 근면한 학업 정신을 길러 주기 위해서 이 시 ‘출발’을 써서 교실 한복판 흰 벽에 붙였던 겁니다.
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작년(1991년) 가을에 북구라파 여행을 하던 길에 만나게 된 스웨덴의 최동진(崔東鎭) 대사의 입을 통해서 그 사실을 추억하게 되었던 겁니다. 최대사가 포도주 몇 잔을 들곤 이 시를 좔좔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내 그 시를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니 하는 고마운 생각에 나도 눈물이 나와버렸던 겁니다. 그러면서 미국 시인 롱펠로의 「화살」이라는 시가 머리에 떠올랐었습니다.

내가 옛날에 무심코 쏘아 올린 화살은
너무나도 빨라서 간 곳을 몰랐었는데
오늘 이 떡갈나무에 꽂혀 있는 걸 보는구나.

대충 이러한 뜻의 시인데 나야말로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시를 이러한 먼 세월, 먼 이곳 스웨덴에서 그 스웨덴 대사의 가슴에서 찾아내다니, 교실에서의 한 마디가 실로 무섭구나 하는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물론 이곳에 인용한 것은 그 시의 첫연입니다.
참으로 흐뭇했었습니다. 최대사는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이 시를 암송하곤 했답니다. 언제나 새로운 꿈을 가지고 그리고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그러니까 자기 진학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다는 겁니다.
시는 이렇게 감동의 언어입니다. 감격의 언어입니다. 그 힘입니다. 말에 주는 그 힘입니다.
의미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힘이 전달되는 언어입니다. 그 말입니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 언어의 힘을 얻기 위해서 실로 많은 시들을 읽었습니다. 짤막한 시간들을 이용해서, 수업시간 사이 사이에 있었던 토막난 시간을 이용해서.
이렇게 읽었던 시들이 힘이 되어 나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그 청춘을 무한한 낭만 세계로 이끌어 주고, 해방 후 내 길에 있어서 좌절된 나를 구출해주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물리ㆍ화학의 길에서 새로운 문학의 길로 나를 인도해 주었던 겁니다.
실험실도 없고, 연구실도 없고, 교수도 없는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 자연과학계에서 좌절한 나를 시의 세계로 이끌어 준 힘이 바로 이러한 시의 언어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인간 영혼의 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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