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고독과 실존 / 오세영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5-04-10 18:12
조회수: 5747 / 추천수: 93
 
3.고독과 실존/오 세 영(시인, 서울대학교 교수)
   --조병화 전집 10.(학원사, 1988)에서 부분 발췌


《밤의 이야기》에서 시인은 인간의 삶을 한계 상황에 갇혀 있는 삶, 퇴락에 직면한 삶으로 인식한다.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5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것을 살아 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이 쫓겨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 온 거다.
   - <밤의 이야기> 17.

삶의 종말이 죽음에 이른다는 인식을 철저하게 보여 준 시이다. 물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자연의 한 이치로서 마치 봄, 여름, 가을의 변화와 같이 무자각적 또는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와 이를 자기 성찰적 대결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다르다. 인용시에서 시인이 받아들인 죽음의 태도는 그것이 후자의 경우와 같다는 점에서 실존적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을 무자각,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일상인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생의 본능이 충족되는 향락적 삶일지도 모른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같은 삶의 태도 말이다. 그러나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 앞에 서 있는, 즉 절망을 통해서 자기를 성찰하는 인간에게 있어 인생은 결코 향락과 사치 또는 본능 충족적 삶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죽음 앞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가치 의식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인은 먼저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 삶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밤의 이야기> 연작시들에 제시된 밤의 이미지는 이렇듯 생의 한계 상황으로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낮의 환희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밤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의 망각 속에서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는 것이며, 하루는 일몰로써 종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밤(죽음)을 직시하는 사람들은 또한 시간의 절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병화의 시에서 시간이 지닌 운명의 파국성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너와 내가 살고 있는/이 시간은/죽어간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그 시간이다”(<밤의 이야기> 45.), “지금 눈앞에 지나가옵는 거 무수한 시간이오나/나의 시간은 아니옵니다”(<낮은 목소리로> 54), “시간이 생명을 버리듯이/버리며 버리며”(<낮과 밤>) 등은 눈에 띄는 대로 몇 개 인용해 본 것이지만 제13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의 핵심적인 주제는 이 시간의 한계성에 관한 인식이라고 보여진다. 그 중에서도 이 시집을 대변한 <의자> 연작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는 거,
실로 변하는 건
움직이는 것들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 ! 우리 이 자리에 없으려니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건
사람뿐이다.

시간에 집을 지으라
생각에 집을 지으라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
     - <의자> 6

삶의 일상성과 시간의 절대성이 잘 그려져 있다. 시인은 여기서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는 것”이며, “실로 변하는 것은 사람” 혹은 “움직이는 것들” 뿐이라고 말한다. 무한자로서의 시간과 유한자로서의 삶이 불변하는 것과 변하는 것,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운명적인 것으로 대비되어 있다.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이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섭리 앞에 인간의 일체의 가치, 의미, 그리고 삶 그 자체는 파멸당한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요 시간의 한계성  안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써 새롭게 거듭난 삶, 깨어있는 삶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조병화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실체를 두 가지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가 고독한 존재라는 점이요, 둘째가 허무한 존재라는 점이다.

①잔인하도록 쓸쓸히 사는 거다.
  너와 나는 하나의 인연의 세계에서
  같이 있다 하지만
  차가운 긴 밤을
  빈 손을 녹이며
  잔인하도록 쓸쓸히 그저 사는 거다.
    - <밤의 이야기> 12

②보이옵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옵는 세계에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에
  가득히 차 있사옵는 것은
  마냥 고요한 있음과 없음, 실은 “空”이옵니다.

①은 존재 조건을 고독한 것으로, ②는 허무한 것으로 파악한 시들의 예이다. 시인은 인간의 삶을 “잔인할 만큼 쓸쓸한 것”으로 또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것”을 빌어서 잠시 살아 있는, 근본을 ‘공’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에는 언뜻 불교 존재론을 연상시키는 대목도 없진 않지만 앞으로 언급될 바와 같이 그가 기본적으로 현세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과 꼭같이 일치하는 것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떻든, 조병화에게 있어서 이 생의 삶이 고독하고 허황하다는 깨달음은 존재의 한계 상황 -즉, 죽음과 시간의 절대성에 대한 실존적 의식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인은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 근본적으로 허무하고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이 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여기에는 세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생 그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어떤 피안의 세계로 초월해 버리거나 절대자의 품에 귀의해 버리는 태도이며, 둘째는 순간적 행복과 쾌락에 탐닉함으로써 자아를 망각해 버리는 태도이며, 셋째는 그와 같은 비극적 존재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주어진 현실을 가치 있게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인간적 승리를 쟁취하려는 태도이다. 조병화는 이 세 가지 입장 가운데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그의 삶의 태도를 두고 실존적이라 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병화가 이렇듯 현실 긍정과 삶의 성실성을 확고히 다지는 도정엔 그 나름의 수행과 생에 대한 달관이 선행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먼저 일상성에 대한 집착, 생의 욕망에 대한 유혹을 버리고자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생의 본능적 욕구를 버림으로 해서―생 그 자체가 허무하고 무의미한 까닭에―그는 보다 더 성실한 삶,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초탈한 삶, 달관의 삶이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이 생에 가치를 부여했던 모든 헛된 것을―미혹을 미련 없이 버리고자 하는 초탈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속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상성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삶을 속박시키고 드디어는 파멸에 이른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생에 미련을 두지 않은 것은 오히려 생을 충실히 살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그것은 사심 없는 사람이 매사에 공정한 이 세상의 이치와도 같다. 그런데, 생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 즉, 인용시에서처럼 아무 때나 훌훌히 작별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한 마디로 인생을 나그네와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조병화의 시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나그네’, ‘길’, ‘여행’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의식, 따라서 언제인가 올 그 작별의 때를 대비하여 삶에 미련과 집착을 두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는 태도는 앞서 지적했듯 시인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버리는 것이 소유하는 것이요, 비어 있는 것이 오히려 충만한 것이라는 도가적 역설의 경지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조병화 제2기 시에서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은 그의 기독교 성서 탐구이다. 그 결과는 제12시집 《쓸개포도의 비가》로 묶여지는데, 여기서 그는 결정적으로 절망을 극복하여 삶의 현실성을 수용하는 긍정적 인생관을 확립하게 된다. 비록 존재 조건이 비극적이고, 일상적 삶이 헛된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이 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 주어진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개척해 나가는 행위야말로 참다운 인생의 길이 된다는 사실을 성서로부터 깨우친 것이다. 가령,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 그리스도의 교훈 같은 것 말이다. 인생을 달관함으로써 자칫 이 세계를 초월해 버릴 수도 있었던 시인이 끝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생명이 있는 곳, 사람이 있는 곳,
어디 하나 올무 없는 곳 있으리
       - <올무>
  ‘살아 있음’ 곧 현재성, 또는 현실성에 대한 강한 믿음과 긍정이 표현되어 있다. 구약성서 <신명기> 제7자의 말씀을 시로 쓴 <올무>에서 시인은 인간의 살아 있음 그 자체로부터 커다란 의미를 발견하고 있으며, <전도서> 제1장의 말씀을 시로 쓴 <헛되고 헛된 것>에서 역시 시인은 살아 있음의 고귀함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 대한 그의 절망적 인식에 분명 하나의 서광이자 구원의 깨달음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이 흙이나 돌멩이가 아닌 생명, 그것도 정신의 무한한 사유가 가능한 인간임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이렇게 그가 존재의 한계 상황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을 때의 그는 단순히 미망과 일상성에 속박된 퇴락한 현실인으로서의 그는 아니다. 그는 이제 정신적 자유인이며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생을 초극할 수 있는 ‘깨인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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