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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언어 나그네’의 여로와 정처 / 김광규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5-04-10 18:14
조회수: 5648 / 추천수: 129
 
‘언어 나그네’의 여로와 정처/김광규(시인, 한양대학교 교수)
  --조병화 전집 7권(학원사,1988)에서 부분 발췌


  평생에 걸친 그의 문학적 지속성과 생산성은 아마 우리 시단에서 그 유례 찾기 힘들 것이다. 더욱이 그의 시집이 나올 때마다 많은 독자에게 널리 사랑 받아 김소월 이후 한국 시인의 대명사로 그의 이름이 꼽히게 된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러나 그의 시를 읽어 보면 자명한 결과하고 수긍된다.
  편운의 시는 누구에게나 읽는 괴로움 대신 그림처럼 보는 즐거움을 준다. 원래 물리 화학을 전공한 이학도에서부터 정반대의 대척자로 변신한 그는 이미 10여 회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화가이기도 한데, 그 솜씨는 시화집이나 여행 시화첩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나 있다. 대개 간결한 선과 폭넓은 여백으로 처리한 그의 그림은 사물의 인상을 핵심적으로 파악하여전달해 주면서 보는 사람에게 쾌적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해 준다. 그의 시도 그렇다. 때로는 오히려 그림보다도 더 빨리 독자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희망이든지 체념이든지 달관이든지  가리지 않고 공감을 통하여 읽는 마음에 위안을 준다. 이처럼 신속하게 전달과 공감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가 시에서 간접적인 우회의 표현 방식이나 난해한 메타포를 되도록 피하고, 구어체의 일상어를 사용하여 직접적인 진술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기나 고백체의 형식도 소박한 언어와 어울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커다란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독자적 형식 속에다 누구나 느끼고 겪는 삶의 내용을 실감나게 담고 있는 것도 독자를 사로잡는 큰 이유일 것이다.
  조병화 시인의 개인적 정서와 체험에서 비롯되어 보편적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테마의 하나로 예컨대 ‘어머니’를 들 수 있다. 일찍이 그는 《어머니》라는 시집을 낸 적도 있지만, 여기서도 ‘어머니’는 곳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적선을 배우면서>에서 ‘어머니’는 선의 실천자로 기억된다. ‘거리에서, 골목에서/ 지하도에서/ 손을 내미는 측은한 사람 보면/ 한 푼이고, 두 푼이고, 빠짐없이/ 동전을 주고 지나시던 어머님 모습’을 생각하며 시인은 ‘배워도 배워도/ 모자라는’ ‘적선을 배운다’. 삶의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서도 ‘어머니’의 깊은 인간성은 헤아릴 바가 없다. ‘제2차대전 최후의 전투가 있었던’ <미크로네시아>의 절벽 ‘반자이 클리프’에서 시인은 ‘어머니!’하고 부르짖으며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지는 ‘어린 일본 군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장 어려운 때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어머니’는 탄생뿐만 아니라, ‘사자의 세계’에서 죽음까지 돌보는 초월적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어머님! 절 늙게 해 주십시오>에서 시인은 불안․공포․초조․미련 등 모든 ‘생자의 고독’을 극복하고 ‘죽음이 툭 치더라도/ 까딱하지 않게(……)/ 동요치 않게 해’ 달라고 어머니에게 기도한다. ‘어머니’가 얼마나 커다란 내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시<어머니>에서 가장 종합적으로 드러나 있다.

  어머님은 속삭이는 조국
  속삭이는 고향
  속삭이는 안방
  가득히 이끌어 주시는
  속삭이는 종교

  ……(중략)
    
  어머님은 속삭이는 우주
  속삭이는 사랑
  속삭이는 말씀
  속삭이는 샘

  아득히, 가득히
  속삭이는 눈물
  속삭이는 기쁨

  위에 나타난 ‘어머니’는 시인의 작고한 모친을 포함하면서 이미 그것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기쁨’과 ‘눈물’, ‘안방’과 ‘고향’, ‘사랑’과 ‘종교’, ‘조국’과 ‘우주’를 모두 포함하는 이 ‘어머니’야말로 편운의 시에서 삶과 죽음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위’이며 또한 ‘형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어머니’라는 근본 테마를 추구하는 과정은 ‘고독’과 ‘허무’의 두 기점 사이를 오고가는 진자 운동의 양상으로 파악된다.
  편운의 고독은 바로 삶의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지구는 이긴 자만이 살 수 있는 곳’, ‘이긴 자만이 좀더 살다 떠나는 곳’이고 <시가 팔리지 않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하늘․공기․별․이슬․풀밭․개울․우물․그늘․구름․흙이 없고 사람이 없다.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이 소외된 현대 도시에서 시인은 아무런 희망도 느끼지 못한다. 희망의 <봄은 하늘에 떠서> 도시로 내려올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와 가정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내면적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여행’으로 외부에 나타난다. 시인은 인공의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아 시골로 간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난실리>에 가보면 ‘내 고향 난실리에 어느덧/ 서양의 바람’이 불어 ‘특수 작물을 재배하는 움막’ ‘하우스가 들어와 벌판을 차지’하고 ‘겨울 바람’만 불어 온다. 더구나 ‘금 따는 하우슨 모두 객지 살마 거다’. 시골까지 도시의 손길이 뻗쳐 온 것이다. 그래도 ‘움다, 움시유, 흙냄새 툭툭 고향의 사투리/ 양풍 불어도 닦이지 않는’ 시골의 정취가 좋아 편운은 ‘한 조각 뜬 구름’처럼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정월 초하루/ 오전, 오후를’ 시골 버스에 몸을 싣고 털털거리는 경기 중부 길을/ 광주로 이천으로 장호원으로 충주로/ 수안보로/ 마음을 실어 놓고/마냥 내려가’면서 ‘집을  비우고/ 사람을 비우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비우’기도 한다. 그의 여행시들을 살펴보면 한국의 산천을 두루 안 가 본 데 없고, 외국 여행도 온 세계를 곳곳이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을 흔히 여행에 비유하는데, 그의 생애는 고독을 벗어나 다시 고독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것이 또한 공백 없이 시로서 기록되어 있다. 삶=여행=시의 3일치를 이룩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과 시가 일치하는 하나의 예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나이 50대 중반이 되어 그는 자신이 ‘종점’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다. <종점 풍경>에서 그는 시인으로서 자기가 지나온 여정을 돌이켜 본다. ‘그 길로 빠졌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드메를 지나가고 있을까/(……)/ 오로지 남은 외길/ 끝없이 지나오며/ 저녁, 이 노을(……)/ 그 구름 아래쯤 해서/ 곧은 나무 아래/ 길가쯤 해서/ “난 이제 여기서……” 말을 닫고/ 훌훌 길을 비켜서게 되겠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고독과 함께 걸어온 삶의 여로 ‘종점’에서 그는 이제 비켜설 준비를 하고 있다.
  세상은 바쁘게 변함없이 복잡하고 소란스럽게 돌아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갈길을 재촉하는데, ‘“난 이제여기서……”’ 그만 작별을 하고, 길을 비켜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기서 <겨울 과수원>의 침묵과 성숙과 초탈과 예지를 따르지 못하고, 마침내는 ‘포자처럼 떠도는 언어 나그네’인 자기의 시가 겨울 과수원의 ‘정처를 따르지 못한다’는 자각은 바로 ‘허무’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허무’에 직면하면 보통 사람은 체념하거나 달관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시인이란 이 ‘허무’까지도 언어의 포충망으로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고독’의 여로 ‘종점’에서 마주친 ‘허무’를 그는 여러 시편에서 되풀이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허무’를 본질적으로 손에잡히지 않는 것이므로 하나의 느낌이나 생각에 머물 뿐 형상화되기 힘들다. 차중에서 떠오르는 ‘그 생각’도 아마 ‘허무’의 편린일 것이다.
   ‘그 생각’은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고 또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삶과 죽음, 고독과 허무의양극을 오고가는 존재와 형성의 진자 운동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머니’로 종합될 수 있을 뿐이다. 세속적 인생 철학의 클리셰로 자주 쓰이는 ‘어머니’라는 말이 편운의 시에서 이처럼 심화․확대될 수 있는 것은 그의 개인적 정서와 체험이 시적으로 승화되면서 보편적 공감을 획득했다는 증거라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건국․6․25 사변이 숨가쁘게 뒤따른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에 걸쳐 편운 조병화 시인은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후 1970년대 제4공화국에 이르기까지 4반세기 동안 우리 시문학도 많은 변화를 겪으며 발전해 왔다. 모더니즘과 릴리시즘, 실험시와 참여시, 난해시의 극복과 일상시의 대두 등 여러 가지 문학적 방법의 발전과 주제의 변화가 계속되는 동안 편운은 꾸준하게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리하여 어떤 경향이나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조병화 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전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어 보아도 우리는 그 언어와 형식, 주제와 내용에서 쉽사리 그것을느낄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을 겸손하게 긍정하고 일상의 고독과 허무를 진솔하게 노래한 편운의 시는 앞으로도 널리 읽혀 문학과 대중을 연결시키고, 서민에게 위안을 주는 민주적 역할을 지속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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