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782호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흐른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1-06-18 17:57
조회수: 90
 
43 밤의 이야기ㆍ17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것을 살아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시집 『밤의 이야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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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우체국 동쪽에 가는 청계천이 삼청동에서부터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복개가 되어 그 밑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 지저분한 청계천이 흐르고 있는 동쪽 길가에 '고향‘이라는 일본 술집이 있었습니다. 나는 저녁마다 다른 술집으로 벗을 찾아가기 전에 이 ‘고향’집에서 정종 대포 몇 잔을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 술집엔 이화여대 방용구 교수, 최완복 교수, 유근석 교수, 이석곤 교수, 이러한 고급 술꾼들이 단골로 출입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뎅이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마음이 좀 우울해서 혼자서 이 술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저녁이 좀 일러서 그리 손님이 없었습니다. 나는 긴 바(대)에 앉아서 따끈한 정종을 시켜 놓고, 오뎅을 서서히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론 이 집 ‘고향’에선 한잔하곤 명동 술집을 찾아서 정든 친구들을 만나러 갈 판이었지요.
  그런데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이 무렵,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4ㆍ19 학생운동, 5ㆍ16 군사혁명, 사회혼란 속에서 인생의 무용지물인 나를 늘 확인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살 곳은 못 된다,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이 늘 나를 부정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다는 말이 나를 흔들면서 순식간에 이 시를 즉흥적으로 만들게 했던 겁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쓰고, 쓰면서 마시고, 이 시를 다 만들고선 이 집에서 나와 시원한 기분으로 명동을 향해서 어두운 밤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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