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결실
1954년 3월에 나는 제4시집 인간고도(人間孤島)를 출판했다. 1953년 가을에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바로 그 다음 해가 된다.
피난 도시 부산에서 약 3년간 왁짝왁짝 옹색한 생활들을 하고 돌아온 서울 거리는 말 그대로 재의 도시, 황폐한 폐허의 거리였다. 그러나 그 황폐한 재의 거리 서울, 그리고 명동에서 또다시 그립던 벗들을 만나는 기쁨은 “오, 너도 살았구나.” “어디로 피난했었지?” 하는 것이 인사말이었다. 그리곤 돈이 있는 대로 명동에 있는, 버섯처럼 솟아 나는 동동주 싸구려 술집들로 모여 들었었다. 참으로 모든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 폐허의 명동이 지금은 어떠한가. 참으로 거대한 상점가, 그 돈의 빌딩으로 솟아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수복할 무렵엔 명동 거리는 예술가(시인•소설가•연극인•연예인•화가•음악인……)와 언론계의 인사들로 인기를 되찾아 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거리로 되어버렸다. 때문에 수복할 무렵의 명동의 술집은 어디나 예술과 언론, 대학 지성인들의 향기 높은 거리였었다.
그 무렵 나는 서울 고등학교에서 수학 선생을 하고 있었다. 경희궁 서울 고등학교에서 수업이 파하면, 나는 광화문으로, 옛 중앙방송국 앞문 쪽으로, 영국 성공회 옆길로, 시청 앞 광장으로, 소공동 가는 언덕길로, 조선 호텔 앞을 좌로 돌아, 경향 신문사로 으레 일과처럼 한 번은 들르곤 했다. 문화부장으로 소설가 김광주 선생, 부원으로 유호, 박기원, 심태민, 김진찬 이런 분이 있어서, 퇴근하면 같이 명동으로 가곤 했다. 가을이었다. 서울에 와서 소공동 언덕을 걸으며 다음과 같은 가을 첫 시를 쓴 일이 있다.
바다 냄새에 젖은 바바리 外皮(외피)를 걸치고
생명이 무성한 街路樹(가로수)
얕은 그늘 아래를 다시 걷는다.
돈도 책도
이와 같은 모든 遺產(유산)이 허물어진
재 속에
앙상한 몸뚱아리만 솟아 들고
바람이 차가워 드는 거리
내 人生(인생) 首都(수도)의 거리
담배 꽁초도 버리고 싶지 않은
아스팔트에
세월처럼 落葉(낙엽)이 내린다.
우수수 落葉(낙엽)이 진다.
오오 ……
사랑하는 사람들이어
나의 애인들이어
小公洞(소공동) 가는 언덕
落葉(낙엽)이 우거진 그늘 밑을
…………
徐徐(서서)히 걸으시오
죽음은 가고 인생은 남고.
｢가로수」라는 제목의 가을의 시이다.
바다 냄새라는 말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뜻을 내포시킨 것이며, 그 무렵 한자를 많이 쓴 그 원문대로 이곳에 옮겨 본 것이다.
이 시에서 그 무렵, 그러니까 1953년의 가을, 폐허 서울의 가을을 독자들이 느껴 줄는지 모르나, 아뭏든 일단은 ‘죽음은 가고, 인생은 남고’였었다. 그 남은 인생들이 다시 서울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서울 가로수는 너무 다듬어져서 어디에 가로수가 있는지, 기억이 희미할 정도이지만, 서울 수복 후의 서울 가로수는 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음이 으스스할 정도로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가지를 쳐 주지 않아서 그야말로 봉두 난발(蓬頭亂髮)이었다. 그러니까 집, 건물들은 다 전화(戰禍)로 부서지고 가로수만이 우거져서 처량한 서울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봉두 난발한 소공동의 가로수를 잊지 못한다. 가을이 올 때마다. 가을은 떠들썩했던 여름을 다 보내고 고요하게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계절이다. 이 세상 만물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계절, 모든 것이 숙연해지는. 계절이며, 모든 생각이 솟아오르는 계절이다. 반성하며, 정리하며, 다시 다짐하는 깊은 사색의 계절, 실로 내적으로 익어가는 계절이다. 정신적으로 살찌는 계절, 그리고 가라앉은 무한한 사색의 공간에서 스스로의 생명과 맞대 앉아서 스스로와 이야기하며, 그 스스로를 실감하는 계절이다.
때문에 많은 시인들은 가을이 오면 생기를 되찾아서, 많은 작업을 시작한다. 자기가 찾아야 하는 언어들을 마침내 가을의 열매 줍기처럼 찾아다니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의 언어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 언어를 보석처럼 닦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언어의 광채로써 많은 인간들에게 즐거움, 그 생명의 희열 같은 것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실로 시처럼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으랴. 그것처럼 번개와도 같이 순간적으로 우리 몸에 부딪혀서 기쁨과 위안, 그 사는 용기를 주는 말이 어디 있으랴.
시는 실로 우리들 인간의 영혼의 보석이라 하겠다.
이 가을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만 하나. 지금까지 많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직도 정리를 못한 것들이 많다. 그것들을 뒤적거리며, 버릴 거 버리고, 추릴 거 추리고, 담아 둘 거 담아 두어서 어느 때 어떻게 나의 종말이 오더라도 깨끗이 사라질 수 있게 해 두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정리,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가을처럼.보다 가치있는 인생을 살다 가기 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