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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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2020.6.27.오후 1시)
곽효환 시인을 초대하여 그의 문학세계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은 그의 시에 담긴 위안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만들었다.

일시: 2020년 6월 27일(토) 오후 1시
강연: 곽효환 시인
장소: 조병화문학관 세미나실



작가와의 만남
주최⦁주관∣조병화문학관    
후원∣경기도. 안성시.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한국문학관협회


차  례
작가와의 만남 / 곽효환 시인
진행 _김종회

1부. 강연  -나의 시 나의 삶/3

∎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하기
  
_ 곽효환

2부. 시낭송/10

∎ 백석과 용악을 읽는 시간
_ 하종우
∎ 마당을 건너다
_ 이영희
∎ 앞서 간 사람들의 길
_ 채인숙
∎ 오수 사람
_ 김옥선
∎ 의자 -조병화
_ 마대복

3부. 질의 응답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하기

네 번째 시집 『너는』(2018)을 내고 얼마 후 일이다. 저녁시간 지하철 홍대입구역 출구에서 한동안 길을 잃었다. 누구를 만나기로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마을버스로 환승하려했던 것도 같고, 아니면 특별한 목적이 없이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온 것 같기도 해 일순 혼돈스러웠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은데 아직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분주히 움직였고 카페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버스정류장엔 초록색 지선버스와 파랑색 간선버스들이 싣고 온 사람들을 부리고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새로운 사람들을 태우고 홀연히 떠났다. 그렇게 한참동안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앞에 서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가끔 이렇게 길을 잃는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길을 찾는 전기가 된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펼쳐드는 것은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시집을 상재한 후 매번 길을 잃곤 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년 가까이도. 아마도 한 권의 시집을 낸 다는 것은 부단히 고민하고 망설이고 질문하며 걸어온 한 여정을 갈무리하는 것과 같기에 다시 새로운 여정을 향한 출발을 앞두고 그 사이에서 곧잘 길을 잃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다시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질문은 막막하지만 어쩌면 내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위인들의 거창한 말을 빌려 오지 않더라고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지금의 나로부터 이어져 있는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걸어온 길은 지금 서 있는 자리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한편, 앞으로 가야할 길을 가늠하고 추동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시집을 펴낼 때마다(다른 시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시집의 시인의 말 또는 시인의 글에 이정표를 남기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 펴낸 네 권의 시집 가운데 제2시집 󰡔지도에 없는 집󰡕과 제3시집 󰡔슬픔의 뼈대󰡕 그리고 최근에 펴낸 제4시집 󰡔너는󰡕까지 세권을 같은 출판사에서 냈는데 이 시선집 시리즈는 시집의 머리에 서문 형식의 ‘시인의 말’을 그리고 시집이 끝나는 표4에 ‘시인의 글’을 각각 요구한다. 시집의 머리나 말미에 ‘시인의 말’을 싣고 표4에는 동료 또는 선후배의 과분한 추천사를 받아 ‘폼 나게’ 마무리하는 게 일반적일 텐데 이렇게 한 시집에서 시인에게 두 번 말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시인의 말’과 ‘시인의 글’을 구분해서 맨 앞과 맨 뒤에 싣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머리의 ‘시인의 말’은 해당 시집에 대한 시인의 입장을, 맨 뒤의 ‘시인의 글’은 시인의 시론 혹은 시에 대한 생각을 쓰는 것으로 내 나름대로 정의했다. 출판사의 의도와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의하고 나니 자연스레 ‘시인의 말’은 해당 시집의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썼고 ‘시인의 글’은 그동안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가게 될 지도 모를 시에 대한 생각(시론)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여기에는 시집을 낸 후 번번이 겪곤 하는 길 잃음에서 오는 막막함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를 테면 편운문학상 수상시집이기도한 『슬픔의 뼈대』는 나(우리)의 시원이자 궁극의 공간인 ‘북방’을 호출하고 그것을 통해 “차단된 삶의 여로이고 단절된 역사의 현장이며, 잊혀져가는 오래된 정감의 고향이자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그리움의 진원지”를 천착한 시집이다. 그래서 ‘시인의 말’에 “길의 끝 / 북방의 시원 / 그리고 사랑의 궁극에는 / 무엇이 있을까. // 백석과 용악과 신문, / 내 글쓰기의 스승들과 동행하며 /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 멀고 긴 여정 속에서 / 내내 담담하고자 했으나 / 그늘 깊은 곳에서는 / 더러 울기도 했다.”라고 썼다. 내가 이 시집에서 열망하고 천착한 ‘북방’이라는 공간이 어떤 공간이고 그 길을 가게끔 만들고 또 함께 동행한 스승이자 길동무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 길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그런 다음 ‘시인의 글’에서 시인으로서 나는 소심한 겁쟁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86세대로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은 끝에 어렴풋이 깨달은 시인의 길이기도 하다. 앞에 서서 용기 있게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하는 사람. 하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쓴 그동안의 ‘시인의 글’들은 자연스럽게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이자 시인으로서의 길을 모아놓은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시집을 낼 때마다 여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며 더듬더듬 새 길을 찾은 흔적이 보인다. 앞으로도 시집을 펴낼 때마다 내 시의 길은 에둘러 가기도 하고 가로질러 가기도하고 때로는 그냥 터벅터벅 나아가기도 할 것이다. 아직 진행형인 이 길에서 내 시선과 발길이 닿았던 사람, 사물, 풍경들과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울림을 가지고 축적되고 또 교감할 수 있어가기를 바란다.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과 세 번째 시집 󰡔슬픔의 뼈대󰡕 그리고 네 번째 시집 󰡔너는󰡕의 표4 ‘시인의 글’을 차례로 소개하는 것으로 ‘시인의 길’을 갈음한다.
        
  두어해 전,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의 길을 되짚어 가는 여정에 오른 적이 있다. 상해에서부터 가흥, 항주, 무한, 남경을 거쳐 중경에 이르기까지 ‘청년 백범’과 임시정부의 흔적을 좇는 수천 킬로미터의 멀고 긴 길에서 참 많이 울었다. 고통의 연속인 칠흑 같은 길을 선택한 용기도 놀라웠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쫓기는 피난길에서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토굴에 웅크려 떨면서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편지를 쓰고, 일기를 남긴 앞서간 사람들. 그 슬픈 그늘을 보며 어느새 중년이 된 나이도 잊은 채 어른거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엉엉 울고 싶었고 때론 울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그 삶들이 시라고 믿는다.

  ‘나는 다르다’는 선언에서 시는 출발한다. 이것은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외부와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와 세계, 나와 시대와의 불화와 화해, 단절과 회통을 내 몸으로, 내 눈으로, 내 목소리로 부딪치고 느끼고, 보고, 소리 내어 말하려는 열망의 발화. 더디지만 마침내 징― 징―, 하고 울리는 그 서사의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내는, 울림이 큰 그런 시를 쓰고 있는지 아니 쓸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지도에 없는 집』(문학과지성사, 2010)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첫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월레 소잉카는 “내 소설은 병에 대한 치료약이 아니라 두통거리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이 더 지난 오늘에도 나는 여전히 시의 길을 묻는다. 시인은 아니 나는 소심한 겁쟁이다.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하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한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느냐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그리고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냐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먼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망설이고 주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골똘히 사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며 사유한 결과를 내놓는 것이 시와 시인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불화의 지점에서 먼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혹은 대신 아파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나는 다시 묻는다.
                                 ―『슬픔의뼈대』(문학과지성사, 2014)


여름

커다란 머리핀으로
긴 머리를 틀어 올렸다


딸아이 민경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쓴 시다.
나는 가끔 어린아이가 쓴 이 한 줄을 읽으며 시를 생각한다.  
새롭고 선명한 이미지, 참신한 비유,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 그리고 맑고 투명한 정
신.
                                 ―『너는』(문학과지성사, 2018)


군옥수수를 파는 인디오 여인

물 위에 세운 도시
그러나 강이 흐르지 않는 땅
이곳의 광장은 숨어 있다
대성당, 궁전 혹은 관공서 가운데 분지처럼
하오 다섯시의 광장, 줄지어선 군인들의 국기게양식
뱀의 몸통을 문 독수리의 모습에서
호숫가에 선 선인장에서 광장은 엄숙하다
흐린 여름하늘 아래 도시의 전설은 천천히 날개를 편다
광장의 과거를 덮은 대성당의 과거는 아스텍의 神殿
밑동을 드러내다만 발굴을 중단한 인디오의 사원
수세기를 넘나드는 좌판시장에서
군옥수수를 파는 인디오 여인의 그늘진 얼굴
그 얼굴에 어린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다시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제1의 사탕수수의 해* 무렵
뗏목을 타고 돌아온 사람 닮은 神을 위해 준비된 성스러운 처녀**
아니 열한 척의 배를 타고 건너온 말을 탄 정복자의 情婦
그녀가 몸을 섞을 때마다
해가 다시 뜨고 하얀 전설이 들썩이고
그녀의 産痛을 따라 북이 울리고 피가 흘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또 모든 것이 새로이 세워졌다
하여 그녀는 인디오의 첫 번째 어머니
사라진 문명의 광장을 따라 흘러가는 얼굴들
새로운 문명의 광장을 따라 모여드는 사람들

어머니의 기다림은 새로운 태양의 시대
뗏목을 타고 떠난 케찰코아틀의 귀환
해가 뜨는 동쪽 바다를 건너 백마 타고 온
수염 기른 하얀 성인을 맞은 그날은 슬픈 첫날밤
그 밤, 갓 초경을 치른 스무 명 성녀의 몸은
정복자의 욕망의 배출구가 되고
인디오의 왕은 동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갔다
그녀의 별자리는 불운과 투쟁
그녀의 운명은 제5의 태양의 시대를 내린 증인
性慾과 言語의 중개자
동족을 등진 첫 번째 여인
정복자의 자식을 낳은 첫 번째 어머니
그 아들은 첫 번째 메스티소, 첫 번째 혼혈 아메리카인
그리고 사라진 제국의 마지막 사생아
정복자의 언어로 삶과 죽음을 넘나든 절망과 희망을 낳은 어머니
이제 그녀는 없다
텅 빈 광장에 버려진 첫 번째 인디오의 순혈은 없다
광장은 어머니를 모른다
                                        ―『인디오여인』 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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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스텍 문명의 신 케찰코아틀(Quetzalcóatl)이 귀환을 예언한 해. 메소아메리카 신화에서 인류에 삶을 부여해주는 사람 닮은 神으로 통상 깃털 달린 뱀을 지칭한다. 악의 신들의 시샘으로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수치심에 못이겨 뱀으로 만든 뗏목을 타고 떠나며 세 아카틀(Ce Acatl, 아스텍력으로 제1의 사탕수수의 해)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동쪽 바다로 떠났다고 한다.
**말린체. 본명은 말린친.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지금의 멕시코에 원정 왔을 때 그것을 인디오 전설에 의한 신의 귀환이라고 믿은 아스테카족의 왕 목테수마가 예의 표시로 보낸 스무 명의 인디오 처녀 가운데 한 명으로 코르테스의 애인이자 통역 역할을 했다. 인디오와 스페인의 피가 섞인 첫번째 메스티소의 어머니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나는 고려 사람이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연해주에 처음 온 아버지는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다
그는 얼어붙은 잠든 땅 연해주에 농지를 개간하고
가난해도 굶지 않는 조선인 마을을 세웠다
파란 눈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경이로운 개척자였지만 내내 이방인이었다

다음 아버지 때 조국은 식민지가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연해주로 건너왔다  
아버지는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국경을 넘나들며 싸운 독립군이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독립군 간 싸움에서
다른 편 독립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조선독립군도 러시아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다음 아버지는 중앙아시아로 실려 왔다
며칠 동안 황급히 짐을 꾸려 일가족을 데리고
영문도 목적지도 모르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화물칸 너머로 연해주와 시베리아가 멀어졌다
달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때마다 주검을 내려놓고 간 더 먼 곳에서  
맨손으로 땅을 파고 갈대 덮은 토굴에 둥지를 텄다

아버지는 독일과의 전쟁에 소년병으로 지원했지만
적성민족은 군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집단농장의 영웅이 되기로 했다
수백만 평의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는 기적을 만들고
다시 수익금을 바친 끝에 영웅칭호와 국적을 얻었다
대신 말과 글을 잃었고 회갑을 며칠 앞두고
말발굽에 가슴을 밟혀 집단농장 옆 묘지에 묻혔다

나는 러시아말을 배우고 대학을 마친 황색 러시아인
어느 날 소련이 해체되고 CIS 국가들이 독립국이 되자
일을 찾아 다시 이주의 길에 나서야 했다
우즈베크어를 모르는 나의 국적은 우즈베키스탄
거주지는 경기도 안산 러시아 마을 염료 공장 쪽방촌
내 아들은 직업을 찾아 모스크바 근처 어디에
늙은 에미는 타슈켄트 외곽 고려인촌에 산다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다시 연해주로 모스크바로 서울로 유전하는 나는
나의 조국을 모른다
이리 떼 속에 살기 위해 더 강한 이리가 되어야 했던
빅토르, 콘스탄틴, 게오르기, 니콜라이, 소피아지만
대대로 김, 이, 박, 최, 정씨가 아닌 적이 없던 나는
가끔씩 소연방 시절을 그리워하는 고려 사람이다

                                        ―『너는』 문학과지성사, 2018.  



백석과 용악을 읽는 시간
                                                            곽효환(낭송 하종우)

먼 바닷가에선 눈발이 날리는 새벽 두 시 이십구 분,
성에 가득한 창가를 서성이는 불면의 밤
백석과 용악을 읽는다
바구지꽃과 흰 당나귀와 나타샤를 사랑한 사람,
꽁꽁 언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차마 눈감을 줄 모르는 사람,
가없는 북방대륙의 거센 눈포래를 뚫고
그들을 따라 끝없이 끝없이 헤맨다
두터운 바람벽도 미덥지 못한 술막에 들어
흐릿흐릿한 등불 아래 술잔을 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어느새 앞서 간 두 사내는 사라지고
찬바람 숭숭 드는 흙벽에 기대어
예서도 나는 잠들지 못하고,
지난여름 티베트 가는 길목 붉은 황토고원에서 만난 장족 소녀와
무성했던 잎새를 다 떨군 날, 이별을 선언한 그네를 생각한다
희미한 붉은 숯덩이 한 줌 재로 풀썩이며 화로는 식어가고
눈물 고인 쓸쓸한 몸을 부리면 영영 잠들 것 같은 겨울밤
다시 눈포래 치는 벌판을 휘정휘정 돌아오며      
내가 사랑했던 꽃과 나무와 지명과 사람을 차례로 불러보며
내가 그리워하는 백석과 용악을 읽는다
어른거리는 시행 사이로
이제 곧 남의 사람이 될 그네가 어지러이 지나가고
끝내는 백석과 용악과 내가,
바구지꽃과 흰 당나귀와 나타샤와 그네가 뒤엉켜
목 놓아 울며 겨울 강을 건너는
어깨를 들먹이며 끝내 잠들지 못하는 이 밤

그만하면 됐다
겨우내 그만치 앓았으면 이젠 다 털어내도 되겠다

                                        ―『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사, 2014.



마당을 건너다    
                                                           곽효환(낭송 이영희)


그 여름밤도 남자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들이 지키는 남쪽 지방 도시 변두리 개량 한옥
어둠을 밀고 온 저녁 바람이 선선히 들고 나면
외등 밝힌 널찍한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저녁상을 물린 할머니를 따라
평상에 자리 잡은 누이와 나 그리고
막둥아! 하면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던 코흘리개 동생은
옥수수와 감자 혹은 수박을 베어 물고
입가에 흐르는 단물을 연신 팔뚝으로 훔쳐냈다
안개 같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할머니는
그날도 마작판에 갔는지 작은댁에 갔는지 모를
조부를 기다리며 파란 대문을 기웃거렸고
부엌과 평상을 오가는 어머니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둠이 더 깊어지면 할머니는 두런두런
일 찾아 항구도시로 간 아버지 얘기를 했고
마당을 서성이던 어머니는 더 과묵해졌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달과 별과 호랑이, 고래와 바다를 두서없이 얘기하다
스러지듯 평상 위에 잠든 아이들을
할머니와 어머니는 하나씩 들쳐 업고
별빛 가득한 마당을 건너 그늘 깊은 방에 들었다

그런 밤이면 변소 옆 장독대 항아리 고인 물에
기다림에 지친 별똥별 하나 떨어져 웅숭깊게 자고 갔다

                                         ―『너는』 문학과지성사, 2018.  


앞서 간 사람들의 길
                                                            곽효환(낭송 채인숙)

칠흑의 길을 앞서 간 이들을 따라
바다를 닮은 호수를 품은 내륙 도시를 지난다
호반을 둘러싼 아름드리 오동나무
굽고 비틀리고 휘어진 굵은 가지 마디마디
먼저 이 길을 간 사람들의 삶이 그랬을지니
더디게 더디게 오는 여름 저녁놀 아래서
편지를 쓴다, 누군가 꼭 한번 읽어줄

엉엉 울며 혹은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걸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그 슬픈 그늘에 대하여

상해 가흥 무한 남경 그리고 중경
한 발짝도 내다볼 수 없는
농무 자욱한 길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일기를 쓴 사람,
토굴에 웅크려 떨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사람,
다시 그날이 와도 숙명처럼
그 길을 묵묵히 갈 사람들에게
철 이른 들국화라도 만나면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담아 가만히 들꽃 소식과 함께
바람에 실어 보내리니

고맙다고
고마웠다고
그래서 나 오늘 다시 이 길을 간다고
무심히 여름 벌판을 적시는 강물에도 길이 있다고
길 너머 다시 길이 있다고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사, 2010.

오수 사람
                                                             곽효환(낭송 김옥선)

경복궁 서쪽 한옥마을 초입 체부동잔치집 한켠에서
중년의 사내 셋, 초로의 사내 둘이 술추렴을 한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서 왔다는 사람들
나는 전주 사람이고 오수는 아버지 고향이라고 해도
다들 괜찮다고 탁배기 잔 가득 막걸리를 채워준다
잔은 돌고 말도 끝없이 돌며 이어지고 흘러간다
의견(義犬)이 났다는 오수, 봉천리 군평리 오암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머리에 하얀 서리가 앉은
인생의 반은 벌써 지났고 전성기도 지났을
초면의 쑥수그레한 사람들이 이내 편안해지는 것은
그들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고향말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흉내 낼 수 없는 그러나 그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씨와 억양과 소리의 고저장단 때문일 것이다
내 몸속 깊이 숨어있던 유전자가 울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이 건너던 철다리는 사라지고
마을의 절반 이상이 빈집이 된 지 오래일지라도
밤 솔찬히 깊어도 도란도란 이어지는 오수 사람들의 술자리
오래전 돌아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사라진 마을의 풍경과 인심이 내내 함께 있었을 게다
나의 기원이 오롯이 들어있었을 게다

                                        ―『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사, 2014.

의자  
                                                     조병화(낭송 마대복)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곽효환(郭孝桓)
- 1967년 전라북도 전주 출생
- 건국대학교 국어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한국시인협회 교류위원장, 상임위원장 역임.
  서울 연희창작촌 운영위원 및 운영위원장 역임,
  한국작가회의 이사,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 현재:   대산문화재단 상무, 계간 『대산문화』주간,
          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겸임교수

- 시집:   『인디오 여인』(2006), 『지도에 없는 집』(2010), 『슬픔의 뼈대』(2014),
          『너는』(2018) 등

- 저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2008),
          시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2014) 등

- 편저:   『아버지, 그리운 당신』(2009), 『구보 박태원의 시와 시론』(2011),
          『초판본 이용악 시선』(2012),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백석 시그림집』(2012),
          『이용악 전집』(2015)공편),
          『청록집 ―청록집 발간 70주년 기념 시그림집』(2016),
          『별 헤는 밤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2017) 등

- 수상:   고대신예작가상(2012), 애지문학상(2013), 편운문학상(2015),
          유심작품상(2016), 김달진문학상(2019) 등

                              조  병  화  문  학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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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집은 경기도와 안성시의 지원으로 제작 되었습니다.
    
제목: 작가와의 만남(2020.6.27.오후 1시)


사진가: 관리자

등록일: 2020-08-13 16:38
조회수: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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