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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조병화의 삶과 시 강연(2019.11.1)
2019년 문학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2차 "조병화의 삶과 시" 강연을 개최하였습니다.

1부 연구 주제 발표 “좌절과 방황의 시대”를 강웅식 교수님이 강연하였습니다. 조병화 시인을 기억하는 많은 문인들이 오셔서 조병화 시인의 삶의 철학이 깃든 시 강연에 매료되었습니다. 강연 이후 조병화 시인의 삶과 철학이 담긴 시에 대하여 질문과 대답이 매우 많아서 더욱 알찬 강연이 되었습니다.
2부 시 콘서트에서는 조병화 시인의 철학이 담긴 시를 기타와 대금 반주에 낭송하였습니다. 가을이 물들어가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조병화 시인을 기억하며 시도 음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조병화의 삶과 시
- 좌절과 방황의 시대(1965~1990) -
시간: 2019년 11월 1일(금)오후 1시~4시
장소: 예술가의 집(대학로)
주최: 조병화문학관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학관협회
협력: 한국문인협회 종로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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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으로서 삶의 형식과 시
─조병화 시인의 시세계에 대하여
강 웅 식 (문학평론가)

1.
조병화 시인 자신과 그가 쓴 시 그리고 그의 시작 행위를 떠받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순수고독’(삶)과 ‘순수허무’(죽음)이다. 그는 그의 시집의 많은 서문에서 그 사실을 거듭 밝힌다. 고독과 허무를 수식하는 ‘순수’는 조병화 시인의 어휘 사전에서는 ‘절대’와 같은 뜻의 말이다. 그처럼 동일한 의미의 낱말인 ‘순수’와 ‘절대’가 감싸게 되면, 고독과 허무라는 두 개의 낱말 역시 의미상의 변별적 자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그것들 역시 동일한 ‘기의’의 다른 두 ‘기표’가 된다. 요컨대 조병화의 시인의 시세계와 인생관에서는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게 된다, 아래의 시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수명에 한도 있는 육체
안에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동거시켜
잠시 불을 밝히고 있는
이 가숙(假宿)

작별을 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항상 떠나는 생각
속으로 속으로
그 오늘을 산다

삶은 죽음을 품고
죽음은 삶을 키워
한 몸으로 동행을 하는 거
동행하다 그 몸 허물어지면
그뿐
그곳에서 헤어지는 거

육체는 사그러지며
불은 꺼진다

욕망은 땅에
포기는 하늘에

삶과 죽음, 서로 작별할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
그 길목
그곳에서 나는 바람이지

삶과 죽음
한 몸에
동거하는 이 가숙(假宿)
       ─「인간」 전문, <먼지와 바람 사이>(제20시집, 1972)

조병화 시인에게 죽음은 ‘순수허무’이다. 왜 아니겠는가? 죽음이란 삶의 이편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 따라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이편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화시킨다. ‘순수허무’와 ‘절대허무’로서 죽음은 동시에 ‘순수고독’이자 ‘절대고독’이기도 하다. 죽음은 그 어떤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것, 내가 오로지 홀로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그런 성격 때문에 삶 역시 ‘순수허무’이자 ‘순수고독’이 된다. 삶은 죽음을 향하여 있으므로 살아가는 과정은 죽어가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2.
문제는, 그렇다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서 삶과 죽음 혹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시와 시를 쓴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따져 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문제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시에 관한 조병화 시인의 생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그의 제21시집 <어머니>(1973)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작품은 모두 나의 내면, 외면의 그 존재의 기록들이다. 때문에 나를 떠나서 나의 시는 존재하지 못한다. 때문에 나의 시는 나의 작은 역사다.1)

위에 진술된 내용의 맥락과 동일한 맥락에서 그는 제20시집 <먼지와 바람 사이>의 후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 슬프면 슬픈 대로, 적적하면 적적한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혼자면 혼자대로 그걸로 좋은 거다. 그게 나니까. 나는 나를 떠나서 나의 생애를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럴 겨를이 없었던 거다. 그렇게 쫓기는 현실 속에서 나는 나를 놓을 수가 없었던 거다. 2)

근본적인 취지에서 위의 두 인용문의 맥락과 다르지 않으면서 조병화 시인이 그의 인생관과 함께 녹여서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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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병화, 조병화문집간행위원회 편, <조병화시전집・부록>, 도서출판 편운재, 2016, 52쪽.
2) 위의 책, 50쪽.

시는 나에게 있어서 그 생존의 소멸, 그 멸망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그 위안─순수고독과 순수허무로써 일체를 포기할 수 있는 그 해방과 희열, 그 힘을 길러 주던 유일한 성채였다. 3)

위의 인용문들은 조병화 시인의 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그것은 조병화 시인의 시와 관련된 평가에서 거의 언제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다작의 문제이다. 그 어떤 시인보다 더 많은 작품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적인 평가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아마도 조병화 시인의 다작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다작의 산물인 각각의 시편들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밀도를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병화 시인은 단호하게 그런 평가는 “먼 마을 닭소리 같은 어리석은 자의 말” 4) 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그런 반박에는 그 나름의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근거를 우리는 위의 인용문들에서 찾을 수 있겠는데, 좀 더 면밀하게 그 근거와 관련된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병화 시인에게 ‘순수고독’으로서 삶과 ‘순수허무’로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의 존재가 죽음을 향하여 놓여 있다는 사실의 발견 혹은 각성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죽음을 규정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특징을 ‘죽음에로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 파악한 사람은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일반적인 경우 당장은 자기의 죽음의 가능성, 즉 자신이 존재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그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한 은폐와 도피의 결과는, 비록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 도래할지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규정될 수 없는 가능성인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 ‘세인’(世人)으로서 ‘일상성’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본래적이지 못한’(uneigentlich) 실존이다.5) 그에 반해 죽음의 가능성 그 자체 속으로 끊임없는 불안과 함께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가기’(Vorlaufen)는 ‘자기’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제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본래적’(eigentlich) 실존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또한,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기’로부터 비로소 ‘자기’의 최종적인 가능성 앞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가능성이 본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존재로서 실존하는 가능성인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잠시 살펴본 이유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양식과 관련된 조병화 시인의 각성이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다. 하이데거가 ‘본래적인’ 실존과 ‘본래적이지 못한’ 실존을 구분하는 근거가 죽음을 향하여 ‘앞서 달려가기’에 있다고 하였듯이,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양식에 대한 각성은 그 이전과 이후의 존재 양식을 다르게 한다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조병화 시인이 즐겨 쓰는 표현인 ‘순수고독(삶)’과 ‘순수허무(죽음)’의 경우도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양식에 대한 각성 자체에서 비롯하는 성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각성과 함께 그에게 발생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 혹은 ‘자기임’에 대한 각성이다. 앞서 인용했던 구절들에서도 확인되다시피, 그는 ‘나는 나를 떠나서 나의 생애를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도 하고, 또 ‘그렇게 쫓기는 현실 속에서 나는 나를 놓을 수가 없었던 거다.’라고도 말한다(인용문의 강조 부분은 필자가 한 것임). 그 인용문들에서 주목되는 것은 내가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나’와 내가 놓을 수 없는 ‘나’이다. 그 ‘나’들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양식에 대한 각성,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을 향하여 ‘앞서 달려가기’를 통하여 촉발된 ‘나’이다. 조병화 시인이 말하는 ‘그렇게 쫓기는 현실’은, 하이데거가 주장한바, 인간 현존재가 ‘세인이라는 자기’(본래적이지 못한 자기) 속에서 스스로에게 ‘고유한 자기(명확히 포착된 자기, 본래적인 자기)’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본래적이지 못한 자기’의 모습을 인간 현존재에게 드러나게 하고 현존재를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단독적인 것이 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가능성 앞에 서게 하는 것이 하이데거에게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기’인 것처럼, 조병화 시인에게 ‘순수고독’과 ‘순수허무’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가 부단히 ‘자기임’을 확인하고 돌아보게 하는 실존적 계기가 된다.
조병화 시인은 ‘나의 작품은 모두 나의 내면, 외면의 그 존재의 기록들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나’의 존재를 내가 실존적으로 자각한다는, 다시 말해 ‘나’와 내 존재와의 관계를 부단한 자기임과 함께 맺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작의 시인’이라는,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미된 그 표현을 그가 반박하는 것은 적어도 그의 시편들에는 실존적 표지로서 ‘나’가 각인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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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의 인용문은 󰡔현대시학󰡕지 창간 3주년호(1972.4)에 실렸던 것인데 이 글에서 인용은 위의 책(50쪽)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4) 위의 책, 75쪽.
5)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고유한 존재 양식을 가리키기 위하여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이데거에게 ‘일상적’(alltäglich) 현존재는 세상에, 즉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존재 속에 매몰돼 있다. 다시 말해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여 자기를 상실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관계하고 있다는 것, 누구도 아닌 ‘세인’(das Man), 즉 특정한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고 또한 전원의 총계도 아닌 ‘모두’, 그 밖의 사람들,  ‘그 누구도 아닌 사람’(Niemand), 일정한 의미와 가치의 질서 속에 편입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판단하며 똑같은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 공동의 존재 양식으로부터 스스로의 존재를 이해한다. 따라서 일상적 현존재가 바로 ‘세인’ 혹은 ‘세인이라는 자기’(본래적이지 못한 자기)이며, ‘일상성’(Alltäglichkeit)은 ‘본래적이지 못함’(명확히 자기 자신에 관계하지 못한 존재 방식)과 거의 같은 뜻이다.
3.
내 존재의 가능성이 그 불가능성(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의 각성은 그러한 각성 이전과 이후의 존재 양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의 추구는 윤리적 명령에 가깝지만 그것의 방향과 길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는 분명하게 제시돼 있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없다. 그렇게 없는 길 앞에 무한한 망설임이 있고, 그런 망설임과 함께 성패를 예단할 수 없는 결단과 선택이 있을 뿐이다. 조병화 시인에게 그런 선택과 결단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그의 시의 대표적 형식으로 흔히 거론되는 ‘여행 형식’에 대한 검토와 함께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검토에 앞서 살펴볼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거의 모든 시에 기입돼 있는 날짜와 관련된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작품의 말미에 기입되어 있는 날짜는 그 작품을 산출한 주체가 그것과 관련하여 수행한 작업의 종료 시점, 즉 그 작품의 탈고 시점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인은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시(작품) 쓰기를 멈추는가? 1965년 10월 9일이라는 탈고일이 기입돼 있는 자신의 시 「잔인의 초」와 관련된 ‘시작노트’에서 김수영은 그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 즉 이미 이루어진 부분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새롭게 쓰고, 그렇게 새롭게 쓴 부분 가운데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낱말을 상당한 망설임 끝에 다시 지우는 등의 일련의 과정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으로 추론해 보건대, 그는 그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비로소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스스로 판단한 시점에서 그 작품을 쓰기를 멈추었을 것이다. 김수영의 경우에, 하나의 작품이 예술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의 근거는 새로움이다. 시인 스스로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작품의 새로움을 인정하지 않게 되거나 혹은 시인은 그렇다고 생각해도 비평가를 비롯한 독자들은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적어도 탈고 시점 자체가 가리키는 것은 새로움으로서 작품의 자격의 성취이다. 따라서 탈고일이 가리키는 것은 그 작품과 관련된 작업의 종료 시점이자 그 작품에 기입된, 단 하나이기기에 가지게 되는 고유함으로서 ‘단독성’(singularity)이다. 조병화 시인의 경우에도 작품에 기입된 날짜는 일차적으로 그와 같은 탈고일의 의미로서 기능하겠지만, 그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도 함께 관측된다. 그의 두 편의 시를 보자.

오늘이 1985년 9월 8일
가을이 접어드는 일요일 오후
문화예술의 거리로 개명된 대학로는
제멋대로 흐르는
청소년들로 수라장이다

나는 이 거리에서 40년 전
이곳 대학가에서
길을 묻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제 머지않아
죽음이 나를 데리러 오겠지만

그때 그걸 계속했더라면
그 여인과 같이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차피 인생은 먼 약속에 불과한 거
약속대로 찾아온 길
앙상히 남은 나의 시간 끝에, 아직도

까만 고독이 대롱거린다
열매처럼.
      ─「옛 대학로」 전문,<해가 뜨고 해가 지고>(제29시집, 1985)


“무얼 드실까요?”

“아무거나요”

“첫만남, 첫잔인데요, 먼 훗날
생각날 것을 드셔야지요”

이런 대화가 귀를 스쳐갔다.
     ─「젊은 여인」 전문, <해가 뜨고 해가 지고>(제29시집, 1985)

위에 인용된 시편들 각각에 부기된 내용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1985년 9월 8일에 대학로의 ‘난다랑’이라는 찻집에서 씌어진 것이다. 「옛 대학로」의 경우는 그것이 씌어진 날짜가 작품의 일부로 수용돼 있다. 따라서 그 날짜는 일차적으로 그 작품이 씌어진 날을 가리키지만, 그와 함께, 어쩌면 그보다는 더, 그 작품에 수용된 ‘나’의 체험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젊은 여인」의 경우에는, 시의 화자가 찻집에서 우연히 듣게 된 젊은이들의 대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거기서 정작 부각되는 것은 그 대화에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나’의 체험과 그 주체인 ‘나’이다. 조병화 시인의 시에서 전반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그 작품의 형성 과정에 투여된 에너지보다는, 그것이 회상이든 상념이든 인식이든 그 작품에 수용된 어떤 체험의 순간과 그 체험의 주체로서 ‘나’이다.
조병화 시인의 시에 부기된 날짜가 환기시키는 것은 이른바 ‘여행의 형식’으로 씌어진 그의 시편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실 ‘여행의 형식’이라고 하였지만, 그 계열에 속한 시편들은 여행과 상관없는 내용을 여행의 형식으로 수용한 것이기보다는 실제 여행 체험을 다룬 것들이다. 그 시편들의 경우에도 어떤 여행과 관련된 날짜와 장소가 기입돼 있다. 거의 매일같이,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편이 씌어진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다시피, 그 여행 시편들 각각의 형성 과정에 투여된 에너지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시편들에서도 더욱 부각되는 것은 여행의 과정에서 겪은 체험의 순간과 그 체험의 주체로서 ‘나’이다. 요컨대 ‘여행 형식’의 시편들로 지칭되는 그의 시는 차라리 ‘기행시’(紀行詩)라고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는다는 뜻이다. 여행은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 유람은 아름다운 경치나 이름난 장소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다. 객지는 자기 집을 떠나 임시로 머물고 있는 땅이며, 임시는 항구적이 아닌 일시적인 동안을 뜻한다. 구경은 어떤 것에 흥미나 관심을 가지고 본다는 뜻이지만, 직접 당하거나 맛보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기행이라는 낱말의 뜻풀이와, 그 풀이에 동원된 말들 가운데 포함된 말의 뜻풀이를 연속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병화 시인의 시의 핵심적 특징을 보여주는 두 개의 중요한 의미소와 만나게 된다. 그것은 ‘객지’(타향)와 ‘임시’(유한성)이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듯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인간 존재의 실존 양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삶 자체는 타향에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머무르기에 불과하게 된다. 조병화 시인은 그와 같이 신산한 타향살이로서 삶 전체를 여행의 형식으로 바꾸고자 한다. 실제로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여행을 하고 그 여행의 기록으로서 시를 남겼지만, 더 나아가 실제 여행이 전제되지 않은 내용의 시편들에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는다는 기행의 형식을 적용한다. 앞서 살펴본 두 편의 시(「옛 대학로」와 「젊은 여인」), 국내에서 머무르는 일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체험을 다룬 시에서 보이는 화자의 태도는, 어느 외국의 공항이나 호텔 혹은 카페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는 그의 많은 기행시의 화자의 태도와 동일하다. 그리고 그 기행의 형식이 스며있는 시편들에서 부각되는 것은 구경, 즉 말로만 듣던 것을 ‘직접 당하고 맛봄’의 체험이며 그 주체는 ‘나’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시편들을 가리켜 “나의 작품은 모두 나의 내면, 외면의 그 존재의 기록들이다. 때문에 나를 떠나서 나의 시는 존재하지 못한다. 때문에 나의 시는 나의 작은 역사다.” 6) 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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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병화, 앞의 책, 52쪽.

4.
여행은 여행자에게 주는 것은 말로만 듣던 것을 ‘직접 당하고 맛봄’의 즐거움만은 아니다. 더욱이 여행의 과정에서 부단히 메모에 몰두하는 여행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행의 미덕은 생활의 절박함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데 있다. 그 거리가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은 바로 관조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조병화 시인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인간 존재의 실존 양식에서 비롯하는 ‘순수고독’과 ‘순수허무’로서 삶에 여행의 형식을 부여한다. 그러한 형식 부여의 매개는 기행(紀行)으로서 자신의 시-쓰기인데, 그로 인해 조병화 시인에게 삶은 ‘구경’과 ‘관조’의 리듬에 의하여 박동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가 “시는 나에게 있어서 그 생존의 소멸, 그 멸망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그 위안─순수고독과 순수허무로써 일체를 포기할 수 있는 그 해방과 희열, 그 힘을 길러 주던 유일한 성채였다.” 7) 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는 시를 쓴다는 실천 행위와 그 결과로서 작품을 자신의 실존의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런 시인은 자신의 시(작품)만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거나 스스로의 형상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주체일 수 있다. 그런 주체는 자신의 삶과 생활현실을 자신의 작품과 부단히 교환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경우 시인의 삶은 작품을 위한 봉헌이 되게 마련이다. 작품은 생성되지만 자신의 삶은 파괴된다. 그런데 과연 인간의 궁극적 행복이 예술의 실천에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예술 생산물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인간에 의한 사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만큼, 인간이 예술작품의 목적이지 예술작품이 인간의 목적일 수는 없다. 조병화 시인은 자신의 삶을 시의 생성을 위하여 봉헌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그의 삶을 위해 있다. 그의 시-쓰기의 목적은 필멸의 삶이기에 비롯할 수밖에 없는 허무와 고독 속에서도 가능한 행복의 추구에 있다. 우린, 한 편으로, 조병화 시인의 시-쓰기가 가지고 있는 그런 미덕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시-쓰기에 의하여 구축되는 여행으로서 삶의 형식이 ‘순수고독’과 ‘순수허무’의 삶에 어느 정도 위안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형식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인간 존재의 실존 양식에 대한 각성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열리게 되는 어떤 가능성을 지나치게 좁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사실 조병화 시인의 시-쓰기가 창조활동으로서 시-쓰기와 자기 단련으로서 삶의 실천이 추구하는 탁월한 윤리적 과제인 행복을 향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시-쓰기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시-쓰기에 연결시켜야 했다. 그는,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문제제기에도, 그의 시그니처인 파이프 담배를 물고 빙긋이 웃으며 “나는 내 삶을, 내 고독을, 내 허무를 후회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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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위의 책, 50쪽.


강웅식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 『김수영 신화의 이면』, 『해석의 갈등』,  『시, 위대한 거절』, 『텍스트에서 경험으로』 등
    
제목: 제2차 조병화의 삶과 시 강연(2019.11.1)


사진가: 관리자

등록일: 2019-11-0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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