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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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삶과 시 강연 (2019.9.20)
2019년 문학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1차 "조병화의 삶과 시" 강연을 개최하였습니다.
조병화 시인을 기억하는 많은 문인들이 오셔서 유성호 교수님의 강연에
매료되고, 시낭송에 감동하였습니다.

  조병화의 삶과 시
- 좌절과 방황의 시대(1949~1965) -
시간: 2019년 9월 20일(금)오후 1시~4시
장소: 예술가의 집(대학로)
주최: 조병화문학관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학관협회
협력: 한국문인협회 종로지부




좌절과 방황, 고독과 위안의 서정
조병화의 초기시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편운 선생님에 대한 기억

  제 기억 속에는 조병화 선생님의 편모(片貌)가 얼마 남아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술원에서 역대 예술원 회원의 작품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여 펴내는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가 선생님의 시세계를 맡았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의 혜화동 집필실에 들러 선생님으로부터 썩 귀한 자료들을 건네받았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가장 가까이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연으로 제가 2002년에 나온 평론집을 보내드렸을 때, 선생님께서 매우 정갈한 필치가 담긴 엽서 한 장을 보내주셨던 기억입니다. ‘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예쁜 엽서였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선생님께서 작고하시고 나서 제가 2007년에 외람되게도 선생님 이름으로 제정된 편운문학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저와 편운 선생님 사이에 있었던 찰나적 삽화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제 관계나 문단 선후배 사이로 오랫동안 교유해 오신 분들에 비하면 선생님에 대한 제 기억의 육체는 퍽 빈약할 뿐입니다.
  하지만 편운 시편에 대한 기억은 그리 가난하지 않습니다.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1955)나 「차창」, 「의자」, 「공존의 이유」 같은 인지도 높은 시편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강렬하게 깃들여 있습니다. 󰡔패각(貝殼)의 침실(寢室)󰡕(1952) 서문에 나오는 “식민지의 등대”라는 표현도 선연합니다. 선생님의 지속적 화두였던 사랑, 위안, 어머니, 고향, 보헤미안, 고독, 허무 등도 여전히 아름답게 번져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편운 시학의 중심은 아마도 인생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위안으로 모아질 것입니다. 삶에 대해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셨던 선생님은, 평이한 상징과 비유가 깃들인 담담한 어조를 통해 삶의 고독과 무상 그리고 머물 수 없는 근원적 유랑 의식을 노래하셨습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그 숱한 여행 시편으로 육화되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면서도 대상에 탐닉하는 감상 과잉의 시세계를 경계하시면서, 선생님은 차분한 관찰자로서의 목소리를 통해 존재론적 고독과 자기 위안의 과정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이 택한 시적 대상은 역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 겪는 일상과 내면의 감각에서 발원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삶에 대한 외경에 근거를 둔 존재론적 고독과 그 고독을 견디며 자기 위안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일관되게 취했던 까닭일 것입니다. 어느새 16주기를 지나면서 저는 이러한 편운 시학의 자취를 통해 선생님에 대한 격정적 추모 대신 선생님과의 차분한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고 있습니다.

2. 고독과 사랑 그리고 근원적 무상감

  편운(片雲) 조병화(趙炳華, 1921~2003)는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이래 50권 넘는 시집을 펴냈고, 높은 대중적 인지도와 함께 서정의 균질성을 견고하게 유지함으로써 해방 후 가장 이채로운 시세계를 보여준 시인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그의 시세계는 다섯 시기 정도로 구획되어 논의되어왔다. 제1기는 첫 시집 이후 제8시집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나온 1959년까지의 시기로서, 이때 시인은 편지 형식 시편을 많이 쓰면서 존재의 고독과 그에 대한 위안을 줄곧 노래하였다. 제2기는 제9시집 󰡔밤의 이야기󰡕(1961)로부터 제17시집 󰡔내 고향 먼 곳에󰡕(1969)에 이르는 시기로서, 청춘의 고뇌와 감정이 인생론적 성찰과 철학으로 수렴되는 시편들이 그 대종을 이룬다. 제3기는 제18시집 󰡔오산 인터체인지󰡕(1971)로부터 제26시집 󰡔머나먼 약속󰡕(1984)까지의 시기로서, 시인은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작한다. 이때 비로소 그는 그때까지의 내면 탐구나 방황을 정리하면서 차분한 인생론적 관점을 형성하게 된다. 제4기는 제27시집 󰡔나귀의 눈물󰡕(1985)로부터 제41시집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1994)에 이르는 시기로서, 떠남을 예비하고 죽음을 길들이며 자유 혹은 영원에의 길에 대한 갈망을 직접화하는 때이다. 마지막 시기는 제42시집 󰡔시간의 속도󰡕(1995) 이후 작고하기까지의 작업으로서, 기다림의 종착역으로 고요한 귀향을 준비하는 세계가 그 안에 펼쳐져 있다. 여기서는 제1시집부터 제13시집까지 이르는 시간을 ‘좌절과 방황의 시대’로 명명하고 수습함으로써 조병화 초기시의 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초기작인 「목련화」를 읽어보자. 이 작품은 그의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첫머리에 실렸다. 이후로 인용 시편은 모두 󰡔조병화 시 전집󰡕(국학자료원, 2013)에 의거한다.

철학개론이랑 말라
면사포를 벗어 버린 목련이란다

지나간 남풍이 서러워
익잖는 추억같이 피었어라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의 乙男(을남)이는
흰 블라우스만 입으면 목련화이었어라

황홀한 花冠(화관)에
사월은 오잖는 기다림을 주어 놓고
아름다운 것은 지네 지네
호올로

  목련의 낙화(落花)를 매개로 하여 어린 시절의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의 을남이”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과 “오잖는 기다림”에 대한 역설적 아름다움을 그린 심미적 시편이다. 시인은 “철학개론”이나 “면사포” 같은 인위적인 외피를 벗어버린 아름다움, 곧 “익잖는 추억” 속의 “을남이”의 “흰 블라우스”를 연상하면서, “황홀한 화관에/사월은 오잖는 기다림”을 준 채로 아름답게 지고 있는 목련화를 그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삶의 무상함과 고독 그리고 추억 속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그려낸다. 익지 않고 오지 않는 그 ‘추억’과 ‘기다림’이야말로 우리 삶의 근원적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편운은 삶의 이 같은 역설적 진실을 이처럼 신선한 감각으로 되살려 놓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낙엽끼리 모여 산다」(제2시집 󰡔하루만의 慰安󰡕, 1950)이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 「낙엽끼리 모여 산다」 전문

  이 시편은 낙엽이 지는 가을 숲을 거닐면서 ‘인간의 삶’과 ‘생명이 다한 낙엽’을 대조적으로 연결시켜 사유한 대표 시편이다. 시인은 낙엽 속에서 자신이 버려지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근원적인 슬픔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러한 고독과 슬픔 속에 한참을 배회하다가 다시 귀가하는 시인은, 그 고독이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그래서 이 시편은 인간의 근원적 삶의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낙엽끼리 모여 산다”는 표현은, “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실존적 조건을 암시함으로써, 고독과 허무의 터널을 지나 시인이 생의 궁극적 긍정에 이르고 있음을 또한 암시해준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는 고백도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편운 시학의 고독과 슬픔과 허무는 그 자체로 비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의 형식을 보편적으로 감싸고 있는 보편적인 조건이나 분위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 「의자」 전문(제13시집 󰡔時間의 宿所를 더듬어서󰡕)

  이른바 ‘세대교체’라는 주제가 반복되고 있는 이 인지도 높은 시편은, 그것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 방법으로 ‘의자’를 내주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아름답게 구현되고 있다. 먼저 시인은 세대교체의 역사적 필연성을 “지금 어드메쯤/아침을 몰고 오는 분”에 대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가 계승하는 것의 당위성을 노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먼 옛날 어느 분이/내게 물려주듯이”가 보여주는 현재형 처리는, 과거형 “물려주었듯이”보다 훨씬 박진감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아침’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고 있고, ‘어린 분’은 새로운 세대를 함의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제재인 ‘의자’는 사회적 역할이나 직책을 상징하고 있고, ‘그 분’, ‘어린 분’ 등의 존칭 사용은 자기 겸허와 새 세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편운 시학의 평명성과 함께 순리에 따르는 그의 인생론을 엿보게 해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순리의 시학을, 시인은 「남남 26」(󰡔남남󰡕)이라는 작품에서 “버릴 거 버리며 왔습니다/버려선 안 될 거까지 버리며 왔습니다/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하는 인생에 대한 겸허한 결산의 의지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시인은 스스로의 인생만큼의 고독과 소외를 동반하는 자유를 사는 나그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고독과 허무를 통해 자신의 분량만큼만 자유를 누린 역설의 사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밤의 이야기 17 – 죽음으로」(제9시집 󰡔밤의 이야기󰡕, 1961)를 주목해볼 수 있는데, 여기서 ‘삶’이란 ‘죽음’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라는 역설적 인식을 시인은 보여준다.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걸 살아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 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이 시편에서는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시인에게 삶은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쓸쓸히/죽음으로 직행”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 직행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캄캄함/미움/사랑”은 시인이 살아온 젊은 날의 혼돈과 격동을 암시한다. 그 다음 나오는 “이긴 자/잡은 자/가진 자”들은 한결같이 시인의 삶과는 전혀 방식이 다른 사람들인데, 그들 역시 “쓸쓸함”의 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김/잡음/가짐”은 모두 무상한 것이 된다. 여기서 이 작품의 근간이 되는 것은 ‘허무’와 ‘고독’이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허무와 고독을 반추하고 관조하며 철학적으로 명상하는 사색가의 면모를 띤다. 이때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는 시인의 독특한 삶 인식과 관련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시인은 “나는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혼의 영생을 믿는다.”거나 “사람은 어머니의 고통으로 나와서 그 고통만큼의 고통으로 어머니에게로 간다.”는 표현을 한 바 있는데, 그만큼 ‘어머니’는 편운 조병화 시인에게 생의 발원지이자 궁극적 귀의처인 것이다.
  오랜 시작 과정을 통해 조병화 시편은 사랑, 이별, 긍정, 위안, 어머니, 고향, 보헤미안, 고독, 허무 등으로 그 초점이 형성된 바 있다. 그 가운데 조병화 초기시의 가장 보편적인 줄기를 이룬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하여 끊임없는 철학적 질문을 하였던 그는 자신의 삶을 여행이나 ‘가숙(假宿)’으로 은유하면서, 그 안에서 경험하는 고독과 사랑 그리고 근원적 무상감을 지속적으로 노래하였다. 그러면서도 대상에 탐닉하는 감상 과잉의 세계를 경계하였고 일관되게 차분한 관찰자로서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3. 조병화 초기시의 문학사적 의미

  조병화 시가 택하는 대상은 역사적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보편적 인간이 겪는 삶의 일상성과 내면에서 발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현실 반영이나 형식 미학적 심미성에서 구현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말했듯이 자기 위안 혹은 자기 구원에서 완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한결같이 생에 대한 깊은 외경과 휴머니즘에 자기 근거를 둔 존재론적 고독으로 나타나며, 그 고독을 견디면서 ‘자기 구원’의 경지로 나아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때 그리움과 기다림은 우리 삶의 근원적 형식이 된다. 결국 조병화 시인은 인생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시적으로 탐구하면서도 그것을 늘 평이한 비유와 어조로 노래하였다. 그는 존재론적 고독과 사랑의 시, 자기 구원으로서의 시를 줄곧 써온 인생론적 서정시인인 것이다. 많은 이들과 소통의 공감을 형성해온 친화력의 시인이요, 삶의 심오한 주제를 가벼운 낭만성에 실어 노래한 보헤미안 시인이요, 가숙의 삶에서 고독과 사랑의 시학을 노래한 시인인 것이다.
  이러한 내밀하고도 견고한 시적 전개를 보인 편운 시편의 초기 조감도(鳥瞰圖)는, 그가 지속적으로 제시했던 시적 화두인 사랑, 이별, 긍정, 위안, 어머니, 고향, 보헤미안, 고독, 허무 등의 기표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편운 시편의 주된 줄기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위안으로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하여 끊임없는 철학적 질문을 한 시인은, 평이한 상징과 비유가 깃들인 담담한 어조를 통해 일상적 삶에서 경험하는 고독과 무상 그리고 머물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유랑 의식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상에 탐닉하는 감상 과잉의 시세계를 일관되게 경계하면서, 비교적 차분한 관찰자로서의 목소리를 통해 존재론적 고독과 자기 구원의 과정을 지속적이고 균질적으로 들려주었다.
  또한 편운 초기 시편들은 좌절과 방황의 시대를 구현한 세계로서, 회화(會話)와 구어(口語)에 가장 근접한 소통 지향의 서정시편들이라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1950년대가 소통 불능의 모더니즘 시편을 주류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편운 시편의 속성은 더욱 강조되어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남다른 친화력과 소통 가능성은, 그의 시가 대중적 친근감을 지니며 활력 있는 일상 언어로 구성될 것을 암시해준다. 결국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생’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하면서도 늘 평이한 비유와 소박한 어조로 노래하였다. 그리고 그는 존재론적 고독과 사랑으로, ‘자기 구원’으로서의 시를 줄곧 써온 인생론적 시인이다. 나아가 그는 평이한 시어로 많은 이들과 소통의 공감을 형성해온 친화력의 시인이요, 삶의 심오한 주제를 가벼운 낭만성에 실어 노래한 보헤미안 시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좌절과 방황, 고독과 위안의 서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삶의 궁극을 ‘어머니’라는 귀의처에 둔 서정시인의 생애를 살아온, 우리 시대의 미학적 거장(巨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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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지은 책으로 <서정의 건출술>, <단정한 기억> 등이 있음.
편운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 수상.



시낭송

1. 좌절의 시대(1949-1956)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낭송: 송연주)

≪제4시집: 인간고도≫

당나귀

아이야 그렇게 미워하질 마십시오
그렇게 마구 때리질 마십시오
낙엽이 솔솔 내리는 긴 숲길을
아무런 미움이 없이 나도 같이 갑시다

어쩌다가 멋모르고 태어난 당나귀
나 한 마리

살고 싶은 죄밖엔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살고 싶은 죄밖엔 없습니다

외로움이 죄라면
하는 수 없이 죄인이올시다

낙엽이 솔솔 내리는
저문 이 길을 보십시오
나도 함께
소리 없이 끼여 갑시다

                                                                (낭송: 전옥기)

≪제5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사막

사막은 항상 추억을 잊으려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하더라.

사막은 지금도 마리네 디트리히가
신발을 벗은 채 절망의 남자를 쫓아가고 있다고도 하더라.

사막에 피는 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줄줄 피를 흘리며 새빨갛게 피어있다고 하더라.

사막의 별에는 항상 사랑의 눈물처럼 맑은 물이
고여 있다고도 하더라.

시인이라는 나는 지금 서울 명동에서 술을 술술 마시고 있는데
항상 이런 인간 사막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라.

사막이여 물은 없어도
항상 나에게 밤과 별과 벗을 ......

사막은 항상 네 마음 내 마음 가까이
사랑이 떨어질 때 생긴다고 하더라.


                                                                (낭송: 채인숙)

2. 방황의 시대(1957-1964)

밤의 이야기 47

지금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죽어 간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그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오늘은
죽어간 사람들이 다 하지 못한
그 내일이다

아! 그리고 너와 나는
너와 내가 다하지 못한 채 이 시간을 두고
이 시간을 떠나야 하리

그리고 너와 나는
너와 내가 다하지 못한 채 이 오늘을 두고
이 오늘을 떠나야 하리

그리고 너와 나는
너와 내가 아직도 보지 못한 채 이 내일을 두고
이 내일을 떠나야 하리

오! 시간을 잡는 자여
내일을 갖는 자여

지금 너와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시간은
죽어 간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그 시간

그리고 너와 내가 잠시 같이 하는
이 오늘은
우리 서로 두고 갈
그 내일이다
                                                                (낭송: 송연주)

공존의 이유· 12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 이라든지
우리들만 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낭송: 전옥기)

≪제12시집: 쓸개포도의 비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 아가 제6장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린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다 해도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 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낭송 김용정)

≪제13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빈 공원에서

무엇에 쫓겨서
이렇게 바삐 왔을까?

사람이 사는 곳
욕망과 고독

더러는 잊으며
더러는 버리며
더러는 먼저 보내며
서서히 올 걸

무엇에 쫓겨서
이렇게 바삐 왔을까?

돌아다보며
다시 떠나는 생각

유유한 하늘
마냥 인간만이 변할 뿐

서서히 감세
더러는 잊으며
더러는 버리며
더러는 먼저 보내며
                                                        (낭송 채인숙)



    
제목: 조병화의 삶과 시 강연 (2019.9.20)


사진가: 관리자

등록일: 2019-09-2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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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에 놀러가자. 그림엽서 만들기(안성여자중학교)2019.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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